본문: 사무엘상 24장 1~22절
1. 다윗이 도망 다닌 ‘유다 광야’는 평지가 아닙니다. 산악이 혼재한 척박한 곳입니다. 계곡과 천연동굴도 많습니다. 우기를 제외하고는 물과 풀이 없습니다. 그 황량함과 매마름은 4계절이 선명한 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저히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인 ‘엔게디(En Gedi)’는 조금 다릅니다. ‘사해(Dead sea)’에서 유다 산지 쪽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고, 그 안쪽에 ‘엔게디’가 있습니다.
‘엔게디 요새(23장 29절)’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요새가 아닙니다. 한쪽으로만 길이 있고, 3면이 높은 바위산 계속이라 진입로만 막으면 방어에 유리합니다. (이런 것을 글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엔게디’ 끝에는 ‘폭포’가 있습니다. 숨어 지내기 딱 알맞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에게 ‘엔게디’가 속한 ‘유다 광야’의 지리와 환경은 익숙합니다.
거기에 ‘사울’의 추격대가 온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블레셋’을 쫓다 말고, ‘다윗’을 잡으러 왔습니다. (1~2절)
다윗을 발견하지 못한 사울과 그의 군대는 휴식을 가졌을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사울도 사람인지라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주변에 있는 굴로 들어갔습니다.
2. 그렇게 이어지는 4~22절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가 남다릅니다. 이 내용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는 왕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겸손(?)’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들었습니다.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증 받은 것은 유력한 차기 왕, 사울의 아들, 왕세자인 ‘요나단’이었습니다. 그와 언약까지 맺었습니다. (23장 17절)
‘알고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 이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고, 현직 왕(사울)과 왕세자(요나단)도 그 사실을 다 알고…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게다가 4절은 모든 것에 도장을 찍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여러분이 이 말을 들은 다윗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되는!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상황…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절의 “다윗의 사람들이”한 말을 ‘부추김’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지금 사울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아도 됩니다.
이렇든 저렇든 ‘왕이라는 자리’에 앉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이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3. 하지만, 다윗은 당연한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기 막힌 타이밍!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하는 그 순간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짧은 순간,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라며 기도했습니다. 저라면 휘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설(?)을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많은 굴 중에 딱 여기에 숨게 하셨다. 사울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은 그때 사울에게 생리현상이 일어나게 하시고, 우리가 숨은 굴로 들어오게 하셨다. 내 손에 들린 칼이 무엇이냐?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골리앗의 칼이다. 내가 이 칼로 골리앗의 목을 잘랐다. 이제야 알았다. 그 우여곡절을 겪은 이유, 골리앗의 칼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이 때를 위함’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너희와 나 다윗을 사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조용히, 은밀히) 사울의 겉옷 자락, 좀 멀찍이 벗어 둔 왕의 겉옷 그 껍데기를 벱니다.
4.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 마저도 사울 왕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바꿨습니다.
왕의 껍데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윗을 죽이러 다니는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부르심이 다윗을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 음성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 선택된 것입니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할 때 가능한 ‘생명의 메신저’로 선택된 것입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왕이라는 것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하늘의 모든 권세, 온 우주의 왕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생명의 메신저’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윗’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이기 위한 칼’을 든 사울을 향해 ‘진노의 칼’ 대신 ‘다시 부르시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5. 잘려 나간 ‘왕의 겉옷, 그 껍데기’를 보며 ‘다윗’의 외침(8~15절)을 듣는 ‘사울의 마음’을 또 묵상합니다.
“아, 왕의 자리… 내가 여전히 그 껍질을 벗지 못하고, 내 손에 쥔 칼을 휘두르며 사는구나. 왕의 자리가 주는 힘, 권력, 부유함, 안락함, 안전함, 즐거움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부르시는구나. 내가 죽이려는 다윗을 통해 또 나를 부르시는구나.”라는 마음으로 엎드렸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옳은 말은 많이 합니다. 16~22절의 말은 진짜 많이 합니다. 모르는 게 없습니다. 은혜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입니다.
벌어진 모든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버무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렇게 멋진 타이밍과 기회에 칼을 휘두르는 삶을 삽니다.
내 삶에 펼쳐진 당연한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 기다리는 것, 멈추는 것, 그만하는 것, 내려놓는 것’은 진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 예수님의 선하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진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이 나의 참 만족이라는 믿음과 풍성한 체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다윗은 매일 싸웠구나. 여호와 하나님을 나를 왕 만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닌, 왕이신 하나님으로 붙들기 위해 매일 엎드린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으로 다윗을, 그 다윗을 붙드신 하나님을 묵상하시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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