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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6월 15일 2020년 월요일 묵상

본문: 고린도전서 9장 24~10장 13절



1. 오늘 본문을 요약한다면 ‘이래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착각하는 사람, 나의 자유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죄성은 참 질깁니다. 틈만 보이면 자기 중심으로 돌아섭니다.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종교생활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을 택해야 합니다. 본문 27절의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은 ‘죄의 종 노릇’하던 인간(나)이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 십자가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묶이고, 갇히고, 못박히는 것’을 강조합니다. (9장24~27절)

그렇게 진정한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를 오해함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10장1~10절)


2.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운동경기’에 비유합니다. (9장24~26절)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는 고대그리스로마의 4대 축전 중의 하나인 ‘이스트미아 제전’이 2년 마다 한번 열렸습니다. 당시 최고의 문화, 예술, 체육 축제였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하야 할 것은 ‘복음 전파 사명’을 위해 운동선수들처럼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26절에서 사도 바울이 ‘달음질하고, 싸우듯 최선을 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얼핏 보면 ‘복음전파의 사명’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27절을 향하고 있습니다.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것은 ‘종교적 수행, 고행, 절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속의 생각, 내 속의 감춰진 본성, 내 속의 깊은 자기 우상화’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범한 ‘아담의 육신의 생각, 육신의 손’과 같은 나의 ‘몸(전인격)’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무섭고, 떨리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남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행위구원적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 죄성에 대한 절절한 자기 인식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죽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바라보고, 못 박히려는 강한 의지입니다.

또한 너무 진솔한 고백입니다. “나 역시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하고, 악한 죄인입니다.”라는 솔직한 자기 인정입니다.


3. 신앙생활, 예수님을 믿는 것… 그렇게 만만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믿었고, 이미 구원 받았으니, 천국은 확정이니, 뭐 이정도는 어때…”라는 생각을 한다면 큰일입니다.

10장 1~10절도 그 맥락입니다. “그 위대한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으니… 만나와 메추라기(신령한 음식), 반석의 샘물(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다 된 거 아니냐!”라던 이스라엘 백성의 ‘바알브올 범죄, 놋뱀에 물린 사건’을 상기 시킵니다.

바알브올에서 일어난 음란의 사건은 단순한 성적 타락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것입니다. 인간의 즐거움을 충족시켜주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겸하여 섬긴 것을 말합니다.

놋뱀사건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닙니다. 불뱀에 물린 자들에게 놋으로 만든 뱀을 바라보게 함으로 낫게 하신 영적 의미는 이것입니다. ‘죄인인 나’를 대신해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놋뱀 사건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요한복음 3장 14절)을 짓밟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골고다에 높이 들린 진짜 이유를 망각한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된 생명, 자유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유효합니다. 이 놀라운 영적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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