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23장 15~29절
1.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지를 확인한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삽니다. 사무엘상 21장 이후의 기록은 거의 ‘다윗의 도망과 사울의 추격’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21~22장은 사울과 그의 부하(사울 소유의 가축을 돌보는 목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도엑’이 제사장들을 학살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권력과 야망을 위한 인간의 욕망과 잔인성의 끝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사울의 교묘한 말, 사람들을 움직여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사울의 간교함(22장 6~8절)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사울의 눈에 들고 싶은 ‘도엑’의 말(22장 9~10절)과 행동(22장 18절)이 무섭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 저지른 일이 끔찍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난 사울과 도엑일 리가 없다.’는 자기 신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도 내 생각 반대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 기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놓친 것입니다.
2. 다윗은 좀 다릅니다. 제사장들이 학살당한 원인을 ‘사울의 간사함, 도엑의 잔인함’으로 몰지 않습니다. “나의 탓이로다(22장 22절)”라고 말합니다.
이런 다윗의 태도는 한 때 어느 종교에서 유행했던 ‘내 탓이오!’ 운동(?) 수준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런 식의 겸손(?)은 오히려 자신의 도덕심을 부추기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감정적 동정이나, 후회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친 ‘아비아달’과 함께 합니다(22장 23절).
그런데, 조금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다윗’이 ‘아비아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의 생명을 취하려는 사울로부터 나를 지키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나도 그 분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아비아달’, 당신의 생명을 취하려는 사울로부터 당신을 지키시는 분도 여호와이십니다. 우리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로 피합시다. 나와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한 생명 공동체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품고, 지키고, 돌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연약한 어떤 사람을 돌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머물며, 그 분의 보호하심 아래 살아간다는 믿음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연약한 다른 이들도 이런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머물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한 것에 합당한 마음의 자세, 입술의 열매, 삶의 태도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3. 또 다른 다윗의 특징(?)이 23장에도 이어집니다. 자신 때문에 무고한 제사장의 죽음에 대한 소식에 이어 블레셋의 침략을 당한 ‘그일라’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바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 엎드려 묻습니다. 23장 1~14절에 기록된 ‘그일라’를 구원하러 갈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여호와께 물은 것, 기도한 것’입니다. (23장 2절)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다윗이 전쟁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한 목적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신탁’ 즉, ‘신이 이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주는가, 아닌가?’를 묻기 위한 행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당에게 점보듯이 하나님께 물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다윗을 포함 모든 신앙인이 물어야 하는 이유는 ‘결과에 상관없이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내 의지, 소원, 원함, 바람 등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것을 들었습니다(12절). 그러나, 복수하지 않습니다. 배신에 대한 당연한(?) 응징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일라’를 떠납니다. 바보처럼 묵묵히 ‘그일라’를 떠납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연약함으로 인한 ‘두려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칼’도 무섭지만, ‘다윗을 죽이러 오는 사울의 칼’도 무섭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마음보다 “그래, 이유가 있지…”라는 마음으로 ‘그일라 사람들’을 바라본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은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엇에 빠르게 반응합니까? 좀 더디 가는 것 같아도 ‘엎드려 구한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빠른 ‘나의 경험과 판단’인가요?
4. 오늘 본문은 분명 ‘사무엘상 23장 15절 이하’입니다. 그런데, 이제야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함께 나눕니다.
도망을 치는 위급한 상황, 가장 빠른 판단과 결정이 없으면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엎드렸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전투, 전쟁과는 거리가 먼 ‘제사장’을 품고 갔습니다. (그와 함께한 600명이 모두 군인들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울의 추격군은 모두가 군인이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곳이 ‘십 광야 수풀’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요나단’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요나단’으로부터 들은 위로와 말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닌, 네가 왕이 되어야 한다. 그걸 내 아버지(사울)도 안다.”라는 기절(?)할 이야기를 듣습니다.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16~18절)
저는 이 장면을 마음으로 그리며, 이런 마음 들지 않은 것이 너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다윗은 이 때부터 왕이 되기 위해 모든 고생을 참고 이겼구나”라는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이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이 만남이 중요했구나. 이 ‘요나단’과의 만남을 통해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사울의 마음’을 알았구나. 오락가락하는 사울의 내적 갈등을 알았구나. 그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칼을 내려놓고, 사울을 향해 울었구나! 무엇보다 ‘요나단’의 모든 약속과 말(20장)이 진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5. 우리는 다윗의 삶을 보면서 ‘고진감래(苦盡甘來, sweet after bitter)’를 떠올리면 안 됩니다. 여전히 부족한 ‘다윗’을 다시 ‘요나단’을 만나는 자리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봐야 합니다. 그 만남을 통해 ‘사울’을 향한 안타까움, ‘왕 사울’이 아니라, ‘죄인 사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나를 여기까지 이끄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내가 ‘사울’처럼 생각하는 그 사람도(아니,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너무 길어서 죄송할 지경입니다.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다윗의 기구한 이야기를 통해 ‘훌륭한 다윗’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이런 나를 붙드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십자가 은혜에 사로 잡히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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