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1. 오늘 분문은 ‘고린도 교회’ 내의 구성원들 중 당시 사회적으로 만연한 죄악을 당연한 듯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오늘 본문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모든 죄악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암암리에 너도나도 저질렀습니다. 서로 굳이 말하지 않을 뿐, 다 그렇고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잘 못조차 갖은 논리와 핑계를 동원하여 정당화했습니다.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죄를 즐겼습니다.
오늘날, 동성애 및 동성혼 합법화,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을 합법화하여 공식적으로 즐기려는 것입니다. 법의 테두리를 이용해서 범죄와 질병을 보호받으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치료하고, 돌이키도록 도우려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법제도’를 악용하려는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를 일반적으로 ‘사도 바울이 절제’를 강조한 것으로 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12~20절은 대화 형식을 통해 진행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독자)’의 말을 인용했고, 그에 대한 반박 혹은 대답을 형식을 빌어서 ‘대화법’으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12절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고 네가 말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만찬(연회, 파티)’ 문화에서는 폭식, 폭음, 음란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내가 화려한 만찬(연회, 파티, 축제)에 초청을 받았고, 수락했다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모든 죄악’을 즐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특히, 갓 성인이 된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라는 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의 구호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가하다.(exesti)”는 “합법적(lawful)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법’도 ‘자기’를 위해 이용합니다. ‘하나님의 법’마저도 ‘자아’를 위해 요리조리 적용하고, 이용하고, 활용합니다. 네, 그냥 ‘자아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고 범죄한 이후로 이런 ‘인간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3.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주인됨’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언약’을 통해 이루셨음을 14~20절 이하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지체(몸의 각 부분)됨’을 통해 소유권이 예수님에게 넘어갔음을 말씀하십니다. (14, 19절)
‘음란의 죄’를 생각할 때, ‘머리에 딱 떠오르는 그것’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는 무조건 ‘음란’이듯이, ‘하나님 외에 다른 주인’을 섬기는 것(그것이 돈이건, 명예건, 사람이건, 자아이건)’은 ‘음란’입니다.
이런 죄악과 죄의 유혹에 반응하는 욕망이 밀려올 때,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라고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나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십자가에 매이고, 성령의 통제를 당하십시오. 그것을 기뻐하십시오. 기뻐하는 마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십자가에 매임, 성령으로 통제 당함’이 기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혹시, ‘선악과’ 앞에서 손을 뻗고 있는 ‘아담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있을 겁니다. ‘그 일, 그것, 그 사건’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선악과’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향하여 뻗은 손을 십자가로 향하십시오.
십자가의 피로 나를 값주고 사시고, 그분의 소유, 성령의 전(殿, temple), 하나님의 거할 처소’로 삼아 주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그 분께 영광 돌리십시오. 그러면, ‘선악과’를 움켜쥐려는 손을 펴서 ‘십자가’에 손을 올리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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