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8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시편 8편 1~9절


1. 시편 8편은 다윗에게 속한 대표적인 찬양시입니다. 하늘과 땅,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표제의 ‘깃딧(시8, 81, 84편의 표제)’은 정확한 뜻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블레셋 성읍인 ‘가드’에서 전해온 악기 혹은 어떤 노랫가락(포도즙 틀을 밟는 사람들의 가락)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8편은 인도자를 따라 예배 때 부른 것입니다. 본문에는 ‘우리’라는 복수형을 반복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함께 부르는 것’을 염두에 뒀습니다. 그 내용은 단순히 자연계, 창조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목적에 대한 깊은 묵상, 성찰이 있습니다. 또한 시편 8편의 구조는 전형적인 ‘찬양곡의 가사’답게 A(1절)-B(2~4절)-B’(5~8절)-A(9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음악 구조와도 딱 맞습니다.

2. 1절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절제하여 평범함 속에서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가사입니다. ‘영광’이라는 자칫 권위적일 수 있는 단어를 ‘아름다움’이라는 말로 보완하고,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2절의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를 통해 ‘가장 낮고, 비천한 존재’를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의 역설과 선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진짜 하나님의 멋짐?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움입니다. 힘있고, 잘난 존재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보다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미천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습니다(신7:7). 목동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방법으로 십자가를 택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약점, 아픔,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붙들고 일어서고, 견디고, 버텨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함, 아름다움,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황에도 위로부터 임하는 넘치는 감사, 예배의 감격, 기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3절~8절은 ‘창세기 1장’을 연상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압축하여 기록합니다. 특히, 4~6절은 ‘인간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입니다. “사람(인자)이 무엇이기에…”(4절)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묵상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5절의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고, 완벽하게 창조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조금 못하게”는 하나님과 인간의 넘을 수 없는 한계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부족함은 완전함과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했습니까? “조금 못하게”를 뛰어넘어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은 ‘신적 초능력’을 탐내는 수준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런 인간을 생각해주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악함과 죄성을 생각해보면 4절의 고백에 가슴에 깊이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 깊은 묵상이 있으면 ‘교만’이라는 단어가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를 이용한 자기 영광, 축복을 핑계로한 자기 자랑’의 교묘한 함정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 원함 만큼 채워지지 못함, 내 소원의 이뤄지지 못함’ 때문에 “왜 내게, 왜 아직도, 왜 그렇게…?”라는 푸념 섞인 원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3. 이런 예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블레셋 가드’에 도망쳤을 때(삼상21:10~15), 들었던 곡조에 ‘시편 8편’의 가사를 붙여서 부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말 그렇다면… 시편 8편은 정말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다윗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사무엘상 21장’을 읽어보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겨우 피신한 ‘가드’였습니다. 거기서 살고 싶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노래했습니다. 어쩌면 너무 힘들어 “왜, 나를 창조하셨습니까!”라며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물론, 시편 8편은 어려움에서 건짐 받은 뒤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절망, 고통, 아픔 등’이 있었기에 이 고백과 찬양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함’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각자가 걷고 있는 ‘그 상황의 과정’에서 드리는 ‘시편 8편’은 능력이 됩니다! 또한 ‘그 상황의 끝에서’ 드리는 ‘시편 8편’은 감격이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8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i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