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3장 11~35절
1. 몇일 전 5월 5일은 한국에서 ‘어린이 날’이었습니다. 만약 ‘어린이 주일’에 11~12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부모님들은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반대로 자녀들은 반감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11~12절이 다르게 다가와야 합니다.
2. 11절과 12절에 “징계”로 번역된 히브리어 ‘musar’ 징계는 아무 엄한 것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혹독한 것입니다. 매질을 통해 바로잡는 교정, 경고, 훈계, 교훈을 뜻합니다.
많은 경우 이런 본문을 크게 두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 자녀를 바로 교육하기 위해 꾸지람과 징계, 때로는 매를 때려야 한다고 적용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로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특히,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하신다. 소위, ‘치신다’라고 말합니다.
3.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위에 말씀드린 첫번째 경우를 내세워서 자녀를 교육할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징계와 훈육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내 성격을 못 이겨서 또는 내 감정을 섞어서 징계와 훈육(잔소리)를 하게 됩니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잘해주는 것, 다 들어주는 것도 결국 부모 속에 있는 자기 욕구에 바탕을 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경우를 가지고, ‘하나님이 치셨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다.’라고 말하는 우리의 심리 속에 ‘난 특별한 사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니까 치신 것이다.’라는 알쏭달쏭한 자기 합리화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자기 잘못과 자기 책임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습니까?
4. 그렇다면 12절의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그 기뻐하시는 아들을 징계함” 속에 담긴 영적의미, 복음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더 확실한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을 찾아 읽어보십시오. (읽으신 줄 알고…) 읽으셨다면, 다음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징계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분, 기쁨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이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음성이 떠올라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막1:11, 눅3:22)
5.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엄격히 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찬양의 가사(‘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딱 한가지 이유는 ‘나 자신의 죄인됨에 절망하여 엎드렸는데,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붙들어 주심으로 십자가로 인도함 받은 것,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은 것’ 뿐입니다.
그저 이런 영적 은혜와 비밀을 붙잡게 된 우리를 ‘하나님의 기쁨’이라 여겨 주신 것뿐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로 일컬어 주신 것뿐입니다.
인간의 언어와 이성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십자가의 진리를 붙잡은 사람은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착각, 자기 우월감에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쁨 됨, 사랑 받음, 선택 됨 등을 종교적 특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종교적 지위, 벼슬, 계급 따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6.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전체 문맥 속에서 지혜 혹은 지식이 ‘똑똑함, 명석함, 총명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16절을 보시면 ‘지혜’를 의인화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14~19절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 ‘장수(長壽 longevity), 부귀(富貴, wealth & fame)’를 가지기 위해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이용하려는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장수와 부귀’라고 표현한 것일 뿐, 가장 귀한 것을 가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16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든 것이 ‘생명 나무의 지혜’를 붙든 것임을 알게 됩니다(18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의 주인이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19절).
7. 이런 마음으로 27절 이하의 이웃에 대한 내용을 읽어보십시오. 당연히 이웃에게 선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나눔 속에 담겨있어야 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의 나눔과 섬김을 통해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지체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27~28).
하지만,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언어로 ‘예수님, 십자가, 은혜, 구원 등등’을 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도 있지만…)
십자가 복음은 나눔의 태도, 섬김의 자세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이런 내게 땅의 것들도 베풀어 주신 깊은 감사와 죄송함(?)이 섞인 낮은 마음과 태도로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십자가 앞에 있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자칫 거만해질 수 있는 우리 심령이 항상 십자가에 못 박혀 있길 기도합니다.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이 죽은 그 자리에 영원토록 사시길(장수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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