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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5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룻기 3장 1~13절


1. ‘룻’과 ‘보아스’의 우연한 만남, 그러나 그 우연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었습니다. 선하다는 말 외에 복잡한 설명, 다양한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몰랐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한 거친 인생의 한 발짝을 내디뎠을 뿐입니다.

자신이 일한 밭이 ‘보아스’의 소유인지 몰랐습니다. 자신에게 말을 건넨 ‘보아스’가 시아버지의 친족인 줄 몰랐습니다(2절).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이 있는지 몰랐습니다(13절).

몰랐던 것이 다행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벅찼던 삶이 오히려 ‘룻’과 ‘나오미’의 마음에 쓸데 없는 인간 욕망의 찌꺼기가 쌓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2.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이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전 인생을 맡기는 삶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예상하며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맡겨야 합니다. “맡기면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생각마저 버려야 합니다. 그 어떤 것을 생각하건 ‘내가 생각하는 더 좋은 것’은 결국 ‘찌꺼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에서 내 자아가 못 박혀 죽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가장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의 결과에 대한 ‘내 스스로의 평가’가 사라집니다.

그 결과를 바라보는 죄악된 내 본성의 판단, 즉 ‘아쉬움, 만족함 등’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3. ‘보아스’가 누구인지 알아본 ‘나오미’는 그저 한 걸음만 내디딜 수 있는 일만 알려줍니다. ‘룻’이 오늘 밤, 타작 마당에서 해야 할 일만 말해줍니다. (2~5절)

‘보아스’를 만나기 위한 ‘룻’의 준비는 ‘가진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는 일은 결혼 정도의 일이 아니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가난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두 사람의 형편에 3절의 준비를 한다는 것은 딱 한 번의 기회이며,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부를 드린 한 번의 기회이지만, ‘나오미’는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4절)고 말합니다. ‘보아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를 유혹(?)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발치(발끝)’에 누워있으라고 말합니다.

사실, 4절과 9절의 “이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를 성적인 의미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10절 이하의 ‘보아스’의 행동과 말입니다. ‘보아스’는 젊은 여인이 내 발끝에 누워있는 현재 상황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 만남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본심, 그 마음을 보았습니다.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말보다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9절)


4. 달라도 정말 다릅니다.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그 말을 했는지 핵심을 꿰뚫은 것입니다.

“여종을 덮으소서”에 끌렸다면, ‘육신의 생각(죄악된 본성)’이 움직인 것입니다.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에 끌렸다면 ‘영의 생각(그리스도로 회복된 영혼)’이 움직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귀와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내 생각이 반응하기보다 내 속에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반응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게 들린 그 말, 내가 본 그 상황에 발끈하면 엎드려야 합니다. 기분 좋아 절제가 안 될 때 무릎 꿇어야 합니다. 반대로 낙심과 좌절에 빠질 때 십자가 붙들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5. 룻기를 통해서 다윗왕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에서 멈추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 하나님의 신랑 되심을 싫어 버린 범죄한 나에게 다시 찾아오신 ‘신랑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마음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아스’를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자격도 없었던 ‘룻’, 이방여자, 남편 잃은 ‘룻’이 하나님의 은혜(헤세드, Hessed)를 품은 신랑 ‘보아스’를 만난 이야기를 통해 ‘신부’될 자격이 아무것도 없는 내가 ‘신랑, 예수님’을 만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신랑 예수님, 내 사모하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아름답고, 순전한 마음’을 품은 ‘룻’의 이야기가 그대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지길,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헤세드, Hessed)’가 흘러 넘치기를 축원하고 또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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