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기 2장 14~23절
1.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 계속됩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엎드리는 가운데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장 전반부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인품이 말로 드러납니다. 내면의 성품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물론, 표정과 눈빛 등 전인격적 요소로 내면의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오늘 본문 14절에는 ‘룻(약자)’을 배려하는 ‘보아스’의 내면이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함께 떡을 먹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며 ‘다윗’이 떠올랐습니다. 사울 왕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에게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사무엘하 9장 1~13절)라며 ‘은혜(Hesed)’를 베푼 다윗왕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싫어 버리고, 영원한 배고픔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 하늘의 떡’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2. 단순하게 ‘룻기’는 다윗왕의 ‘족보’가 탄생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물론, 다윗왕의 후손(유다 지파의 계보)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은혜, Hessed)’를 완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헤세드(Hessed)’라고 히브리어 단어 소리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헤세드’는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헤세드’없는 인간은 ‘헤세드’를 이해할 수도, 표현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헤세드(Hessed)’는 ‘은혜, 긍휼, 자비, 인자 등’으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타종교에서도 이런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사용합니다. 왕을 포함한 절대권력자가 피지배자들(백성들)에게 베푸는 ‘어떤 좋은 것’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인간이 이해하는 ‘은혜(이와 비슷한 모든 좋은 것)’는 무엇인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베풉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헤세드(Hessed), 예수님의 헤세드(Hessed)’는 다릅니다. ‘같은 자리, 같은 높이’에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니, ‘더 낮은 자리’로 가셔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야곱의 우물’에 피곤하여 앉으신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요한복음 4장) 나보다 먼저 오셔서 거기 앉아 계신 예수님, 그 자리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그려보십시오.
3. ‘보아스’와 ‘룻’의 식사 장면도 그려보십시오. ‘보아스’도 알고 있습니다. 추수현장의 메마름과 목마름, 고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룻’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그릇’ 속의 식초에 떡을 찍어 먹습니다. (이 장면을 설명할 어떤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식초에 빵을 찍어 먹는 것은 근동지역의 식문화입니다. 물 한잔에 마른 떡(빵) 조각을 구겨 넣는 식사가 아니라, 식초와 함께 먹는 떡(빵)의 맛은 가히 천상의 맛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은 같은 것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생명 없는 나에게 당신의 생명을 똑같이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베풂은 어떻습니까? 뭔가를 나눌 때 어떻게 할까요? 똑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전부를 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선택적입니다. 차등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 너는 그 정도…’라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제 자신도 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것 혹은 더 좋은 것을 누군가에게 베푼다는 것은 너무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헤세드(Hessed)’에 대한 조금의 이해, 조금의 감사만이라도 있다면… 마음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집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나에게 베풀어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 속에 녹아 있는 죄송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땅의 것을 많이 받고, 적게 받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전히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헤세드(Hessed)’를 생각한다면 답답한 노릇입니다.
4. “난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헤세드(Hessed)’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라는 진정한 고백이 있다면, 내 삶의 태도와 걸어가는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그의 눈높이로 내려가게 됩니다. 같이 엎드려 같은 마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런 영혼의 자세와 마음의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 앞에 엎드려 몸부림 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정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흐르는 ‘하나님의 헤세드(Hessed)’를 입은 자인지 말입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십시오. 완전할 수 없지만,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헤세드(Hessed)’를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같은 그릇 속에 담긴 식초에 함께 떡을 찍고, 곡식 다발을 뽑아 조금이라도 더 이삭을 줍도록 배려하는 ‘보아스’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그려보십시오.
우리에게 성령이 주시는 따스함이 밀려올 줄 믿습니다. 그 따스함이 내 속의 냉랭함을 몰아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사람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따스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흐르는 하나님의 헤세드(Hessed)의 따스함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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