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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31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상 15장 1~15절


1. 왕이 된 사울,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우왕좌왕하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기 영광과 자아실현을 위해 신앙생활 하려는 제 속에 숨은 죄성이 보입니다.

13장에서 블레셋과 싸우는 사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전쟁 전에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린 그의 행동 속에서 그가 제사를 드리는 진짜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유는 한가지 ‘승리와 성공’입니다. 최고의 신적 존재인 여호와의 힘을 빌어 승리해야 겨우 시작된 왕의 권력이 막강해지고, 안정되고, 왕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백 번 양보하여 처음이라 의욕이 앞서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마음이 들었다고 치겠습니다.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사무엘상 13장 12절)라는 그의 말처럼 어쩔 수 없었다고 넓은 마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사무엘을 통해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13장 14절에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지, 지금 당장 왕의 자리에서 빼앗는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는 말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울이 영원토록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사울은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돌이켜야 했습니다. 남은 왕의 기간을 제대로 했어야 합니다. 비록 길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왕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3.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이전의 일이 재현됩니다. 이제는 그 핑계가 더욱 교묘합니다.

2절에 기록된 ‘아말렉(Amalek)’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영적 의미를 가진 족속들입니다.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아말렉’에 관한 출애굽으로 거슬러 갑니다. ‘출애굽기 17장 8~16절’에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유월절의 속량, 갈라진 홍해의 역사를 통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언약을 세울 시내산을 향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 ‘아말렉’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에 목말라 지쳐 약해진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그때,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은 모세의 기도와 직접 나가 싸운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그 승리의 자리에 제단을 쌓았고,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이고 불렀습니다.

이렇듯 ‘아말렉’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여전히 괴롭히는 ‘육체의 정욕’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더(more), 더, 더’를 원하는 ‘육체’, 사탄이 건드리면 파르르 반응하는 ‘육체(감정과 생각 포함)’, 매일 매순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자아’를 말합니다.

4. 우리는 분명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걸어야 하는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라 너는 그것을 잊지 말라(신명기 25장19절)”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을 맞이할 때 비로소 ‘영화(Glorification)’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는 그것을 잊지 말라”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아말렉(육체)이 너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짓을 했는지, 또 방심하면 어떤 짓을 할 것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5. ‘사울’, 안타깝게도 아말렉의 위험성(?)을 잊었습니다. 어쩌면 만만하게 본 것입니다. ‘내가 저 정도는 다룰 수 있다.’라는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 진멸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생각을 섞었습니다. 좋은 것은 남기고, 하찮은 것만 진멸합니다(9절).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들을 때,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라고 말합니다(15절).

거짓말입니다. 위기 모면을 위한 핑계입니다. 그의 본심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는 것(12절)’입니다.

그런데, 사울만 그렇습니까? 모두 다 그렇습니다. 난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더 무섭습니다. 우리 얼마나 많이 사울처럼 생각하고, 판단합니까?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든 사울의 결정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기막힌 타이밍 앞에서 하나님의 뜻보다 기막힌 타이밍을 놓쳐 승리하지 못할까 적당히 종교 절차를 섞지 않습니까?

진멸해야 할 아말렉,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보니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들은 없습니까? 그렇게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워놓고 종교의 성지인 ‘길갈’로 내려가 우쭐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 제가 사울입니다. 깜빡하는 순간 ‘자기를 위해 기념비’ 세우는 삶을 사는 사울입니다.”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될까 말까…입니다.) 정말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이 쓰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하시고, 이런 기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고 살아간다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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