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하박국 1장 12~2장 1절
1. 어제, 말씀 드리지 않은 ‘하박국’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질문과 대답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제 본문은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번째 질문은 상당히 깁니다. 왜 그럴까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이해가 안 될 까요? 바벨론을 도구로 유다와 열강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무자비한, 포악한, 교만한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시는 이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2. 오늘 본문(12~17절)에 기록된 ‘하박국’의 두번째 질문 속에는 ‘하박국의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람 생각으로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혼란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2~13절에 드러난 내적 심리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 가?”입니다. “지금까지 반석이시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분명, 하나님은 정결하시고, 선하신데… 어떻게 바벨론(좀 심하게, 저 따위 것)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것도 그들보다 한참 의로운 유다,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십니까?” 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14~17절은 ‘어부와 물고기’의 비유를 통하여 바벨론(갈대아) 사람이 남유다를 포함한 주변 나라들에게 행할 잔혹함과 계속되는 전쟁, 포로, 고통, 수탈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감정이 폭발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3.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 물음, 아룀이 나쁜 것인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든지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종교의 신들처럼 순종이라는 종교적 대전제를 두고 굴종적 관계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지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대화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교제는 ‘기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간까지 살펴보신 ‘시편’이 인간의 이런저런 이야기, 감정, 상태를 하나님께 아뢴 것입니다. 상황에 대한 인간의 속상함, 괴로움, 아픔, 이해 안 됨 등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하박국의 질문’을 기뻐하셨습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해도 다 들어주고, 대답해주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를 대하셨습니다.
4.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과 ‘하박국 선지자’의 깊은 영적 교제는 점점 깊어 갑니다. 하박국서를 읽어가면서 이런 영적 교제의 깊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인도함(고린도전서 2장 10절)’을 구해야 합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가지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하박국 2장 1절의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는 질문(기도)과 대답(응답)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인 ‘기다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시간 간격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만약, ‘즉시’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하박국’은 자유로운 질문(기도) 후에 기다렸습니다. 대답(응답)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기다렸습니다. 1절에 “파수하는 곳(mishmereth), 성루(yatsab)”는 군인 혹은 파수꾼이 성을 지키는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의무, 감당해야 할 임무, 현재 있어야 할 곳’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질문이 많은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 많이 하는 사람,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 깊은 영적 관계로 들어가게 된 사람 ’일수록 오늘 내게 허락된 그 일, 그 삶에 충실합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합당하게 가정, 직장, 삶의 현장, 여러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지금, 오늘, 현재를 놓친 기도, 간구는 안타깝게도 ‘허망한 바람’일 뿐입니다. 한 걸음 내딛지 않고, 산정상을 향해 가겠다는 어리석은 생각과 같습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때론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내게 허락된 삶의 현장을 직시하고, 감당하며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기다림’입니다. 반드시 그 ‘기다림’의 끝에 임할 하나님의 ‘선한 대답’을 기쁨과 감사로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