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14장 15~35절
1. 오늘 본문은 시작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합니다. 20절과 24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의 오염된 생각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재물의 어떠함이 그 사람됨의 평가 혹은 구원받은 것(?)에 대한 증거라는 식으로 생각(혼자만의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그 사람을 미련한 길, 어리석은 길로 걸어가게 만듭니다.
더 엄격하게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나는 가진 것이 있으니 조심해야해.’라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이미 자기가 의롭다는 판단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십자가 앞에 가슴 치며 엎드려야 합니다.
2. 이런 생각은 단순히 재물만이 아닙니다. 재물은 많지 않아도, 도덕심과 명예를 자기 의로움으로 삼기도 합니다. 자녀가 잘되는 것을 축복의 증거로 여깁니다. 심지어 28절을 적용하며 교인 숫자가 많은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목회자도 봤습니다.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드러낼 것도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더 벌벌 떨며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땅에서 누리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을 자기 의로움으로 삼는 ‘사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진정한 ‘생명의 샘’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기 흐르는 생명의 보혈에 나의 심령을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 채워야 합니다.
3. 이 마음으로 20절을 보십시오. 사실 이 말씀을 죄성에 기울어진 사람 생각으로 보면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진 자는 ‘그럼 그렇지’라는 자기 의로움에 빠집니다. 가지지 못한 자는 두가지 반응입니다. ‘뭐 이런 게 성경에 있어?’ 혹은 ‘없어서 서러운데 더 서럽네’라는 식의 반응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반응은 더 다양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재물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고 적음의 결과로 미움을 받고, 친구가 많아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부유해서 주변에 친구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의 친구 혹은 지인(知人, acquaintance?)들이 무엇 때문에 그 부유한 사람 주변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과연 그의 인격과 사람됨 때문에 그 곁에 있는 것일까요? 부유한 사람 주변에 떨어지는 어떤 것들 일명, 콩고물 때문일까요?
(콩고물은 다양합니다. 꼭 재물만이 아닙니다. 이것조차 ‘그래 나에게서 떨어지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있었던 거야.’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4.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솔로몬의 부유함’ 따위를 통해 어떤 말씀하시려고 이렇게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유함의 대명사였던 솔로몬의 삶을 통해 무엇이 가난이며, 무엇이 부유한 것인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은 영원한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부유함은 영원한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 부유함입니다.
진짜 가난은 돈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극빈(極貧 destitution) 한 내 자아(범죄한 자아)가 내 안에 여전히 사는 것입니다.
진짜 부유함은 재물 혹은 명예를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극빈한 내 자아 대신 영원한 부유함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21절). 상대적 의로움에 빠져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착각도 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에게 ‘불쌍하다. 안 됐다.’는 생각 조차 얼마나 큰 교만인지 깨닫게 됩니다.)
5. 정말, 저와 여러분의 전인격이 예수님 때문에 달라지길 간절히 또 간절히 원합니다. 도저히 주님 닮을 수 없기에 내가 죽는 것을 택함으로 일어나는 변화! 내가 죽는 것 조차도 나의 의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에 이끌린 변화! 이런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에 예수님의 성품이 묻어나지 않은 다면, ‘과연 내 속에 누가 사는가? 나의 주인은 누구이신가?’ 죽을 만큼 고민하셔야 합니다. 고민에서 멈추지 말고, 결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0절에 이어 21절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된 예수님, 그 분을 사랑해서 영접한 우리의 영혼의 태도, 그 영혼의 태도로 말미암는 삶의 결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오늘 말씀 한절 한절이 심령에 박혀야 합니다. 애써 회피하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며, 울어야 합니다.
씻긴 하늘이 새로운 오늘입니다. 주님의 씻어주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스스로 높아지거나, 낮아진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아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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