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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24일 2022년 화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상 11장 1~15절


1. 오늘 본문은 ‘사울’이 요단강 동편, 므낫세 지파의 땅이었던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한 ‘암몬’을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주말에 읽으셨던 것처럼 ‘사무엘상 9장’부터 ‘사울’이 등장했습니다. 10장 17절 이하에서 드디어 그는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됩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반대세력이 있습니다. 10장 27절의 기록처럼 ‘어떤 불량배’같은 사람들이 왜, 그를 무시했을까요? 성경에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이렇다할 ‘성과, 업적 등’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과거의 사사(Judge)들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타민족을 물리친 전공(戰功, war merit)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11장의 사건은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암몬의 왕)’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의 반응이 황당합니다. 이럴 수 없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용맹하기로 소문난 지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암몬’에게 설설 깁니다(1, 3절). 싸워 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나하스’의 반응은 모욕 그 자체입니다. (2절)


2. 위기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이때 드디어 ‘사울’이 등장합니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사울’은 달라도 뭔가 달랐습니다. 왕의 자질을 보입니다. 왕으로 선택될 만합니다.

무엇보다 전령에게 소식을 들을 때! 그것도 자신이 오늘 해야 할 일, ‘밭에서 소를 모는 일’을 감당할 때 들려온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Spirit)’이 임합니다. (5~6절)

그렇게 온 이스라엘에 다시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모집합니다. 이제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그렇게 암몬과 싸워 승리합니다. 그 결과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7~15절)


3. ‘사울’, 이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 왕을 대적한 악인이라고 밑도 끝도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평가할 인물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겸손했습니다(9장 21절).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예언까지 했습니다(10장 9~11절). 심지어 부끄러움(?)도 있었습니다(10장 22절). 훤칠한 키와 외모는 그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9장 2절).

한마디로 사울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도덕적 성품, 외모, 성격 등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잘못되기라도 한 것입니까? 하나님에게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울의 문제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세우심 또는 선택 ’그리고 ‘여호와의 영의 임재’를 오늘! 놓쳤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영’이 임한 것을 자기 생각, 해석, 감정 등을 섞어 표출했다는 것입니다.


4. 제가 지금 말씀 드린 사울의 문제는 글로 표현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 그리고 그를 왕이라는 ‘도구(tool)’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한 것, 특별한 것, 자기 본성과 죄성을 가리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그 중에서도 ‘쓰임 받고, 축복받고, 특별한 뭔가를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착각에 빠집니다.

도구로 쓰시기 위해 주신 것이 어느덧 껍데기가 되어 자기 본성과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가린 바 된 죄악된 나의 모습을 감추다 못해 포장하여 드러내려 합니다.

‘사울’은 이 함정에 빠진 사람입니다. 왕이 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가 베푼 대속의 은혜를 붙잡고 매일 엎드리라고 애타게 부르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사울’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 순수했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사울과 다른 점입니다.)


5.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제 마음에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 있습니다. 6~7절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두번째 문제입니다.) 왜, 두려움으로 다가왔을까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것 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怒, anger)’ 크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과연 옳은 반응일까요? 흔히 말하는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여호와의 분노가 임했다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요?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는 행동(소 두 마리를 도축)이 과연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 ‘사울’은 제사를 드리려고 소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 과거의 분노, 과거의 두려움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바로, 사사기 19~21장의 끔찍한 사건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레위인 첩 사건입니다. 그 사건으로 촉발된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전쟁, 그 전쟁의 결과로 겨우 남자 600명 살아남은 끔찍함을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길고, 제 표현의 한계로 상세한 것은 수요예배 때 좀 더 나누기로 하고, 사사기와 함께 6~7절을 생각하며 묵상해보십시오.)

성령(하나님의 영)의 임재는 빛입니다. 불입니다. 임재한 나를 가장 먼저 비추고, 발견된 내 모습과 죄성을 가장 먼저 태우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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