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20편 1~9
1. 시편 20편은 환난에 처한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다윗은 누군가 ‘어려움과 고난’에 처했을 때,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벗어난 ‘영적 경험’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학자들은 ‘시편 20편’은 이스라엘 왕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던 ‘기도의 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편 21편의 ‘시행의 주어’가 “너, 우리”(1~5절)-“나”(6절)-“우리”(7~9절)로 달라집니다. 이 때문에 왕(또는 제사장)과 회중(백성) 전쟁을 앞두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면서 번갈아 낭송한 것으로 봅니다.
2. 시편 20편은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응답하시기를 축복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3절) 마치,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권면하고 축복하는 것 같습니다.
4절은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두고 기도하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마음의 소원과 간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드려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시며, 축복해 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의 방향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7절의 고백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 어떤 절대적 힘, 종교적 대상’이 아니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답의 결과’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중요합니다. 8절에서 “그의 오른 손의 구원하는 힘”은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적, 신적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옳음, 의로움, 공평함’으로 주어지는 ‘응답의 결과’가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소원’에 대하여 ‘Yes’라고 하시건, ‘No’라고 하시건, ‘Wait’이라고 하시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포함됩니다.
3. 이런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없이 시편 20편을 읽는다면, 이 말씀 붙들고 환란에서 건져 주실 것을 기도한다면 진정 성경이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참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를 글자 그대로만 보면 안 됩니다. 특히, “생각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끝까지, 끈질기게, 심지어, 성경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다 들어 주신다.”는 식의 해석은 정말 위험합니다.
4절에서 ‘마음의 소원, 모든 계획’은 이미 하나님께 내 욕심, 욕망, 바람 따위가 굴복 당한 상태의 ‘마음의 소원과 계획’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아가 굴복 당하지 않은 상태’로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도 끈질기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영적 떼쓰기’에 불과합니다. 이런 식의 ‘영적 상태, 영적 수준’으로 시편 21편 전체 특히, 7절 말씀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를 ‘신적 능력을 의지하는 인간의 초월적 능력’을 과시하는 수준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까요? 어린 아이들이 싸우다가 안 될 때, “우리 아빠 0 0 0인데, 아빠한테 다 일러줄 거야!”라는 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적 능력을 덧입기 위한 수단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심령의 밑바닥을 비추는 것입니다.
저는 시편 20편을 보면서 ‘솔로몬’이 생각났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낙성식 기도’에 비슷한 내용(열왕기상 8:44~45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어땠습니까? 결국, 7절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 열왕기상 10장 26~2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이천이라…” 그렇습니다. 신명기 17장 16절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깁니다.
네, 솔로몬의 마음의 소원, 모든 계획은 여호와 하나님께 굴복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좀 과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초월자’일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환란에서 건져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지금 나와 동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 분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을 기뻐했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순수한 영적 아름다움이 회복되고, 유지되길,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건지시는 구원을 체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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