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11장 16~31절
1. 잠언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때 맺어지는 삶의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잠언을 대속의 은혜에 합당한 복음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우리 삶의 결단과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절름발이 신앙이 됩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가증스러움을 주는 종교생활이 됩니다.
십자가 복음과 기독교 윤리는 연결된 것입니다. 윤리적 삶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윤리와 도덕 기준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이 엄격한 것이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삶과 그 열매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구원 받은 사람의 윤리와 도덕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 어떤 것보다 엄격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훌륭하다. 잘 한다.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등등’의 칭찬(?)을 듣는 그 어떤 것의 원동력이 나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엄격히 말하면, 그런 칭찬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드러낸 것입니다.
‘좋은 평가’를 들으려는 우리 마음, 그런 평가를 위해 행한 우리의 모든 행동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자기 의로움만 커지게 할 뿐입니다. 자아를 견고하게 하는 영적 비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걸 쓰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3. 다시 한번 명심합니다. 뭔가 내 삶에서 윤리적 열매로 보이는 결과 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상관이 없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에 조용히 가만히, 죄인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삶이라면 더 심각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도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3. 반복되는 것 같지만, 조금씩 관점과 표현을 달리하며 ‘대속의 은혜, 십자가 복음’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기독윤리적 관점’에서의 해석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잘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죄성의 굴레에 붙잡혀 있는 인간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번역의 미흡함도 한 몫 합니다. 이런 번역의 오류에 관례적인 해석의 선입견이 더해지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대표적인 예가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유덕한 여자’가 얻는 ‘존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근면한 남자’는 과연 누구이며, 그가 얻는 재물은 어떤 성격의 것일까요? (무턱대고, 영적 구원,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문 전체를 차근히 읽으며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4. 이 말씀은 ‘여자와 남자’를 비교한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어떤 행동 혹은 성품을 통해 얻어지는 것(존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근면한 남자가 얻는 결과물(재산)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뜻을 살펴보면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근면한 남자”로 번역된 ‘arits’의 뜻은 ‘어떤 힘으로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다룬다’는 뜻입니다. 즉, ‘폭군, 독재자, 폭압자’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그리고 ‘유덕한 여인’이 얻은 ‘존영’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유덕한’으로 번역된 ‘chen’은 ‘은혜’로 번역해야 합니다. ‘존영’으로 번역된 ‘kabod’는 ‘영광’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와 ‘영광’은 저와 여러분이 아는 ‘그 은혜, 그 영광’입니다. 은혜 받을 그 어떤 자격도 없는 죄인에게 임한 무조건적인 은혜와 은총입니다. 이런 죄인을 불쌍히,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구원하신 것만이 ‘영광,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허망한 듯 말씀을 다시 읽으며, ‘16절은 28절과 연결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 그것이 영혼이라 할지라도 끌어 다가 ‘재물(자아의 이익)’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 이 땅의 허망한 모든 것에 의지했던 나! 그저 상대방보다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높아졌던 나! 폭군의 폭압보다 더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한 의, 십자가 사랑’에 의지하게 하신 그 사실, 진리 앞에 엎드리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6. 이런 영적 태도와 기도, 삶의 결단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조심하도록, 삼가하도록 만듭니다. 네, 22절은 그런 뜻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가진 것들은 정말 귀합니다. (단순 외모가 아닙니다. 유무형의 모든 축복과 달란트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삼가지 않음’ 즉, 십자가 앞에서 자기 점검 없는 태도로 행한 모든 결과는 ‘돼지 코에 금 고리’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 조심스러운 것은 이런 말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7. 우리 제발,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우리 제발, 내 모습을 좀 비춰봅시다. 무엇 때문에 이러고 사는지 돌아보는 것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십자가 바라보는 삶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내가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자리임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영적부담과 질문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나무 십자가’가 ‘생명 나무’이라는 것을 믿고 거기에 의지하며, 기대어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30절)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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