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11장 1~15절
1. 잠언 11장은 ‘정직’과 관련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정직’의 중요성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가정과 국가 등 모든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 골격입니다.
잠언의 내용을 영적 혹은 복음적으로 해석한다는 이유로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영혼과 관련된 영적인 삶과 이 땅의 윤리적 삶은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에 근거한 죄인에 대한 구원(십자가 대속의 은혜)은 윤리적 삶을 동반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나 대신 예수님께서 사십니다.
그렇게 내 안에 예수님은 그저 도구에 불과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생명의 일을 하십니다.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반드시 맺으십니다.
이런 삶의 열매가 나의 의로움이 되지 못할 뿐입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 더 좋습니다. 혹시 내 속에 의로움이 밀려온다면, 조용히 십자가 앞에 엎드리면 됩니다.
2. 이 마음을 놓치지 않고,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잠언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아닌 내 안에 예수님을 통해 이런 열매들이 들어 나길 기도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에 등장하는 ‘공평한 추’로 상징되는 ‘정직함’과 ‘재물의 허망함’, ‘언어와 말에 대한 통제’는 엄중한 것입니다.
정직을 위한 결단, 재물에 대한 시각, 언어와 말의 절제는 탐욕과 교만의 유혹이 몰려올 때 최고의 제동장치가 됩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정직, 재물, 언어’는 다른 것 같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재물로 대표되는 이런 저런 이득을 얻기 위해 정직을 버립니다. ‘공평한 추’를 사용하지 않고, ‘속임수와 꼼수’를 사용합니다(1절).
너무 쉽게 타인과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 보다 곁가지를 붙이고, 추측을 하고, 감정을 싣습니다. 심지어 ‘기도하자’는 말로 남의 이런저런 사정을 말하는 것을 포장하기도 합니다(13절).
3.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안 한다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내 본심을 바로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뚫어지게 봐야 합니다.
‘비난이면 비난이다. 욕이면 욕이다. 비아냥이면 비아냥이다. 열 받았으면 받았다. 질투면 질투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쿠, 내가 너무 심하네.’라는 자각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양심이 찔립니다. 절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저도 똑같은 사람인데, 제가 너무 심했습니다.’라는 최소한의 자기 돌아봄이라도 가지게 됩니다.
4.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함께 기도하자는 이유’로 타인에 대한 말(사생활, 비밀 등)을 너무 쉽게 합니다.
인간이 생각보다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죄성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됩니다.
‘정직’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이익 앞에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직함’으로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자기 이익을 눈 앞에 두고 단 한번의 유혹도 없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와 기도는 “이 유혹 앞에 정직할 수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의 정직함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주님의 정직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또 십자가에 죽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에서 정직하지 못한 내가 죽어야 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5. 성경이 말씀하는 ‘정직함’은 인간의 도덕 기준 수준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3절의 “정직한 자의 성실”은 범죄한 인간의 상대적 정직함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한’으로 번역된 ‘tummah’는 ‘온전한 상태, 완전함, 완벽함’입니다.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100%아니면, 그냥 0%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상대적 의로움 등으로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지,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지 말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성실’로 번역된 ‘yashar’는 ‘수직으로 세워 둔, 꼿꼿한, 똑바른’의 의미입니다. 건축물 등의 ‘수직 기둥’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자의 성실”이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인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0년 전 갈보리 산 위에 그 분의 십자가가 꼿꼿이, 수직으로 세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에 인도함을 받고 살아갑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완전한 의로움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시 꼿꼿하게 세워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Opmerking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