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1편 1~6절 1. 시편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계시가 아닙니다. 땅에서 하늘 위로 전하는 기도이며 찬양입니다. 시편은 땅 위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이며, 진실한 간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는 갖가지 고통, 환란, 아픔, 슬픔, 분노, 갈등, 비방, 고독 등을 견디고 이기며 살아간 흔적입니다.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극한 상황을 믿음으로 당당하게 견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은 ‘다윗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편 90편’의 ‘모세의 기도’는 주전 15세기 인물의 고백입니다. 시편 137, 126, 107편은 주전 6세기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모든 것을 견디고 승리한 ‘익명의 시인’의 고백입니다. 구약 1,000년의 세월을 아우릅니다. 그래서 ‘시편의 고백’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주의 백성들의 고백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시편을 살펴보는 가운데 ‘시편 한절 한 절’이 우리의 진실된 고백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길 소망합니다. 2. ‘시편 1편’은 ‘2편’과 함께 시편 전체로 들어가는 시작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시편’을 기록하는 ‘시인’의 찬양, 고백, 선포입니다. 특히 ‘시편 2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시편 전체의 시작이자, ‘시편 1편’의 시작인 “복 있는 사람은…”을 원어적 의미에 가깝게 해석하면 ‘행복한 사람은’이라고 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esher(이쉬르)’는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일반적으로 ‘복’의 개념을 물질적 소유, 번영 등의 뉘앙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이 말하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종교경전 대하듯 하고, 종교행위를 통한 상대적 의인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성경해석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 ‘행복’은 물질적, 가시적, 현세적 소유의 넘침 혹은 세속적 성공의 여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진 심령의 변화입니다. 영혼의 변화, 마음의 변화입니다. 무엇보다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따르지 않고, 멀리한다는 것은 ‘도덕, 윤리 수준’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3절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를 보십시오. 이것은 ‘존재적 이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스겔 47장(성소에서 흐르는 물)’과 연결됩니다. 회복된 여호와의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로 인하여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가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에스겔 47:12)와 직결됩니다. 3. ‘에스겔 47장과 시편 1편’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로 회복된 심령’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작은 목소리라도 내면서 심령에 그려보십시오. 그러면 “내 심령 밑바닥에 깔린 ‘신앙 생활의 목적, 예수 믿는 이유’가 보입니다.” 만약, 땅의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었다면, 현세의 것을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지만,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꾸만 우리 마음에 침투하는 ‘세속적 가치관’을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 채워지지 못해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영적 갈증’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 갈증’이 있을 때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무는 ‘열매’보다 ‘생명수’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시냇가’에 심겨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의 마른 땅’에서 ‘생명이 흐르는 십자가’에 영혼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시편 1편’을 깊이 묵상하실 때, ‘여호와의 성소에서 흐르는 물, 십자가에서 흐르는 보혈’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여 “철(하나님의 시간표)을 따라 열매(하나님의 원하심)”를 맺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