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언 10장 11~32절
1. 잠언 10장 이후의 내용은 24장까지 하나의 큰 묶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끔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은 연구와 분류 등의 편의를 위해 후대(16세기 경)에 표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역시 기독교 윤리의 기준에서 중요한 삶의 지침입니다. 절제가 동반된 언어 습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정직한 삶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덕목입니다. 이것을 거부해서도 안되고, 거부할 수도 없습니다.
2. 그럼에도 우리는 몇가지를 좀 더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19절은 정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허물을 면하는 요령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22절에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는 여호와의 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24절의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는 말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26절의 ‘게으른 자’는 누구이며, ‘부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27절의 ‘여호와를 경외함과 장수(長壽, longevity)’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29절의 ‘정직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30절의 ‘땅에 거하지 못하는 악인’은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 혹은 얼렁뚱땅 회피하려는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면 안 됩니다. 말씀 한 절 한 절 앞을 붙잡고 ‘예수님 없으면 절대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묵상하고, 씨름해야 합니다.
3. 계속 강조 드리는 것처럼 ‘나는 의인이 아닙니다.’라는 철저한 자기 인정으로 말씀을 다시 읽으십시오. ‘의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나는 그저 의인이라 일컬어질 뿐입니다.’라는 마음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달리 보입니다. 기독교 윤리적인 해석조차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를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 입을 다무는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불리할 때 입을 다무는 것 또는 원래 성격이 말이 없는 것은 ‘그 입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리하고, 내가 손해보고, 내 자존심이 무너져도 말을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정확하고 상세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설명할 것은 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유리하고, 내게 주도권이 있고, 발언을 통해 내게 이익이 발생해도 ‘십자가 앞에 선 죄인의 심정’으로 입을 다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로 말씀을 가만히 읽으시면 제가 나누는 묵상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만 더 나눠보겠습니다.)
4. 자, 그렇다면 22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에는 왜 근심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너무 잘 아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대속의 은혜를 통한 죄인의 구원,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여전히 육신의 삶을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이런 저런 땅의 복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이며, 절제되고 걸러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22절은 첫번째 복이 맞습니다. 만약,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부유함 혹은 누리고 싶은 만큼의 부유함이라면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는 말은 납득이 안 됩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땅의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압니다. ‘조금만 더’ 증후군에 시달리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5. 그래서 저는 누군가 22절의 복이 땅의 복이라고 말하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땅의 것들이 아무리 채워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저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진정한 복은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 마음이면 24절의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가 무엇인지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공의를 통한 죄인의 구원, 그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원함과 갈망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6.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붙잡는 것에 게으르지 마십시오. 매일 매순간 붙잡으십시오. 우리가 이걸 놓칠 때 가장 슬퍼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연기와 식초를 마신 것처럼 눈물을 흘리십니다.(26절)
우리 정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 여호와의 도(道, Road)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29절)
그래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붙들게 됩니다. 30절의 ‘의인이 영영히 옮겨지지 않는 땅’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 애매한 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는 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며 걸어가는 길’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초월적 능력으로 이용하여 나를 위한 길’ 앞에 서게 됩니다.
지혜롭게 잘 선택하여 한 걸음 생명의 길, 십자가의 길에 더 가까이 가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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