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7장 3~17절
1. 오늘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를 중심으로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사건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명 ‘미스바(Mizpah) 집회’라고 불립니다. 과거 ‘미스바 대성회(大聖會)’라는 이름으로 부흥회 등을 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대전환점입니다. 사사기 시대의 암울했던 시대, 특히 ‘엘리 가문의 어두웠던 영적 시기’를 끝내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궤’가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를 사모하는 마음이 회복되었습니다.(7장 1~2절) 그렇게 연결된 것이 ‘미스바’에서 일어난 회개 운동입니다.
2. 여기서 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미스바’에서 모여 ‘물을 길어 붓고, 금식하는 등의 종교 행위(?)’가 ‘회개’를 불러온 것이 아닙니다.
‘집회’라는 사람들의 모임 또는 자칫 종교행사로 보일 수 있는 것 때문에 ‘회개’라는 결과물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블레셋과의 전쟁 승리(10절)’가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우리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종교행위에 만족하여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이 만든 신적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인간 종교 행위의 대가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3.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오직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마음이 회복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 저것에 팔린 마음, 이것 저것을 기웃거리는 마음, 이것 저것을 곁눈질하는 내 마음이 십자가를 향한 전적인 사랑으로 못 박혀야 진정한 회개가 가능합니다.
네, 이미 내 안에 ‘회개’의 심령이 부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무지 ‘회개’할 수 없는 나에게 두 마음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산다!’라는 영적 소망이 생긴 것에서 ‘회개’가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회개’는 반드시 ‘결단하는, 잘라내는, 제거하는, 끊어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적당히 뭉개고, 넘어가고, 회피하고, 덮어두는 삶에서 떠나게 합니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삶의 결단이 매순간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 땅을 떠나는 그날까지 이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다면… 내가 ‘회개’라고 생각한 것은 ‘후회’입니다.
생각보다 ‘후회’만 반복하는 기독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남을 향해서는 매섭게 도끼눈을 뜨고 ‘회개 감별사’처럼 바라봅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서는 관대하기 그지없습니다. ‘후회’하는 나 자신을 토닥거리며 스스로 위로까지 합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너만 한 사람이 없다고 말입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이미 시작된 ‘회개’의 진정한 결단으로 무엇을 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이 회개를 위한 종교행위의 한 절차일까요? 밥을 굶는 것이 결단했다는 상징(?)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가나안의 풍요가 좋아서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을 따라갔던 제가 돌이켰습니다!’라는 삶의 증거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농경신입니다. 농사와 기후를 다스리는 신적 존재입니다. (물론,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이라는 곳에서 먹고 살기 위해, 아니 먹고 사는 수준을 넘어 풍요를 더욱 즐기기 위해 ‘바알’과 ‘아스다롯’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섬겼습니다. 겸하여 섬겼습니다. 섞어서 섬겼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들 중 하나가 ‘섞어 신앙’입니다. 대놓고 ‘난 두 주인을 섬겨(마태복음 6장 19~24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하나님을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맘껏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용하려 합니다.
여기서 떠나지 못하면, 계속 스스로 만든 하나님을 숭배하는 도저히 답이 없는 종교 쳇바퀴를 돌게 됩니다.
5. 물 한모금도 귀했던 그곳, 하루 먹을 것이 전부였던 그 옛날에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했다는 것은 “풍요를 주는 농경신과 그것을 쫓는 탐욕에 절여진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삶의 선포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외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가 감정만 움직인 구호가 아니라, 전인격의 실제였다는 증거였습니다.
또 다시 저에게 십자가의 영적 잣대를 갖다 댑니다. 오늘 그리고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조금씩 삐뚤어지는 제 자아를 절대 신뢰하지 않습니다. 죽은 나 대신 사시는 예수님만 신뢰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진정한 시작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모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주셨음을 믿고, 움켜쥔 손을 풉니다.
이런 나를 살리시고, 회복시키시고, 은혜 베푸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기대어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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