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2장 22~36절
1.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설명하는 여러 자료와 책들의 주제와 서술은 한결 같았습니다.
‘사무엘의 성장’과 대비되는 ‘엘리와 그 두 아들의 몰락’으로 본문을 설명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남의 일처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두 아들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원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간음이라고 말하기도 처참한 이런 일을 저지르고, 이런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별 생각 없이 내 삶에 내버려두고, 방치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정도야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더 교묘하게 감춰진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과 입(평가…)만 두려워했을 뿐,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 두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올 때 ‘엘리’가 보였던 반응(23~25상반절)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저에게 다가온 마음은 ‘대제사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여인과의 동침’이라는 특정한 범죄, 즉 ‘간음’이라는 성적 범죄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생각이 자칫 오늘 본문에 나온 ‘간음’이라는 심각한 죄를 흐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죄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그런 일을 벌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이 종교화, 관습화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범죄한 나 자신에게 종교성이 덧입혀지는 것! 잘 믿는 것 같고, 축복받은 것 같고, 선택받은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엘리’의 반응입니다. 22절에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라는 표현은 단순하게 ‘엘리가 늙어서 판단력(?) 등이 흐려졌다. 영적으로 어두웠다.”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는 ‘엘리’의 방임, 무책임, 내버려둠 이 포함됩니다. 두 아들의 잘못된 행동(12~17절)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닙니다. 엘리가 나이가 들어 늙을 때까지 두 아들의 악행은 반복되었고, 급기야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지른 것입니다(22절).
저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가 정말 몰랐을까요? ‘엘리’가 아들들의 악행을 알게 된 것이 ‘백성들의 소문’이 자기에게 들렸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범죄자를 옹호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봅니다.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심정은 백 번 이해가 됩니다. 만약, 제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저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 잘못 키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아이를 잘 관찰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 자신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4. 저는 ‘엘리’의 문제점(?)을 두가지로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알면서 내버려 뒀다는 것입니다. 몰랐다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성막을 총 관할하는 ‘대제사장’입니다. 아들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가정의 가장입니다.
두번째는 ‘과연 무엇 때문에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훈계도 아닌 듯한 훈계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들들의 악행 때문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에게서 들리는 좋지 못한 소문, 즉 ‘좋지 못한 평판(?)’ 때문입니까?
다시 말하면, 아들들을 향한 좋지 못한 소문 때문에 타격을 입을 ‘가문의 명예, 대제사장에 대한 평가’ 때문에 이제서야 불러 놓고 지적 비슷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엘리’의 지적(‘지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훈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애통한 고백, 반성, 돌이킴’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백성들)의 말, 사람의 평가, 사람의 판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5절의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에서 “하나님”으로 번역한 ‘elohiym’은 ‘재판관, 법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5절 상반절 속에 담긴 ‘엘리’의 마음은 ‘제사장의 손상된 권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입니다. “너희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종교지도자의 권위에 치명적 결함이 생겼다. 이제 누가 우리 말을 듣겠느냐? 누가 우리를 제사장 가문으로 여기겠느냐?”라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말입니다.
5. 상당수의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자기가 존경받기 위해 종교행위를 합니다. 종교 도덕과 윤리를 실천합니다. (저라고 예외일까요? 저도 이런 자기 의로움의 굴레에 한 발 담그고 있습니다.)
‘엘리’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악행이 아닙니다. 그들의 ‘나쁜 행실’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그 중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둘째, ‘엘리’의 방관도 알고 계셨습니다. 알면서 내버려둔 ‘엘리’의 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엘리’의 두려운 마음, 감추고 싶고,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25절 하반절, 그리고 27절 이하를 ‘운명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결정된 운명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27절 이하를 말했다고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두 아들들’을 불러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35~36절을 통해 “이제 나는 대제사장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를 대신하여 새로운 대제사장, 진정한 대제사장(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을 세우실 것이다. 너희들도 나도 그 분 앞에 엎드려야 한다. 다시 돌이켜야 한다. 내 육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여호와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선포하고, 기도하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십자가 은혜 안에서는 늦은 것은 아무것, 포기할 것,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십자가에서 베푸신 긍휼 안으로 나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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