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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11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사무엘상 2장 11~21절



1. 사무엘서는 역사적 기록의 성격이 강합니다. 동시에 인물의 대비를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엘리와 그의 두 아들 vs한나와 그의 아들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사울 vs 다윗’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와 내 집안은 ‘사무엘(한나), 다윗’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들과 그들의 집안은 ‘엘리(두 아들), 사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자신을 너무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 아니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죄성!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면 또 되살아나는 나의 본성을 만만하게 보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삶의 여정을 지나면서 “저런 사람의 인생을 닮아야 한다.”라는 것을 통해 배우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런 삶을 절대 살지 말아야 한다. 나도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놓치는 순간 저렇게 된다.”라는 것을 통해 배우고, 깨닫고, 돌이키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2. 대제사장이었던 ‘엘리’, 그리고 그의 ‘두 아들’은 당연히 제사장이었습니다. 12~17절에 나타난 ‘두 아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제사장’ 혹은 ‘목회자, 종교지도자들’의 죄악이라고 생각하기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강렬합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13~15절 속에 그려지는 ‘제사의 양식’은 ‘화목제(제사를 드린 사람이 제사장과 함께 드린 고기의 일부를 먹을 수 있습니다.)’입니다.

제사장은 화목제의 제사법에 따라 기름을 반드시, 그리고 가장 먼저 태운 뒤에 자신의 몫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받을 몫은 ‘요제’로 드린 가슴과 ‘거제’로 드린 넓적다리입니다(레위기 7장 29~34절).

하지만, 그들은 그 규례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기름을 먼저 태우지도 않았습니다. 고기를 삶는 솥에 갈고리를 넣어 걸려 올라오는 것은 무엇이든 취했습니다.

당연히 골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부위, 더 맛있는 부위가 걸려 올라올 때까지 솥을 휘휘 저었을 것입니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게 주신 몫에 대한 감사, 내게 허락된 삶에 대한 감사보다 내가 원하는 몫, 내가 원하는 인생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풍요로운 솥을 휘휘 젓는 종교 생활’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그 풍요로움도 내가 그려서 상상하는 기름진 어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풍요, 기름진 것은 육체의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저도 ‘기름진’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습니다. 가려서 써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의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땅의 기름짐”(창세기 27장 28, 29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더 많은 표현은 ‘기름을 불 사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제사 전체에 ‘기름’을 태우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기름짐 속에 숨겨진 죄성 때문입니다. “기름진 것을 바라보는 너의 본성, 기름짐을 마음껏, 맘대로 누리고 싶은 네 육신의 욕망과 익숙함을 태워버려야 한다. 그래야 산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안타까운 음성입니다.


4. 본문을 다시 제 마음에 새기면서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두 아들(제사장)에게 고기 속에 기름이 거의 없어 질긴 ‘넓적다리’가 지겨워진 것은 아닐까요?

반복되는 제사… 그렇게 익숙함의 덫에 걸려 기름이 타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지겨워진 것은 아닐까요?

죄를 태우는 상징, 그 기름이 타는 냄새를 맡으며 ‘고소하다. 참 맛있겠다.’는 육신의 생각이 밀려온 것은 아닐까요?

무엇보다 아버지로부터 세습된(물려 받은) 제사장의 직분이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당연함에 짓눌려 두려움, 떨림, 긴장, 감사, 감격 등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 앞에 서서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 그러나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그 말씀(히브리서 4장 12절)으로 나의 심령을 수술 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으로 죄성에 오염된 내 영혼과 전인격이 도려내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과정을 아파도 기쁨으로 이겨내고 있다는 자체가 성화(sanctification)의 길을 간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진짜 망하게 하는 것은 ‘아이쿠’라고 비명 지르는 사건이 아니라, ‘당연함과 익숙함의 늪’이라는 것을 ‘엘리의 두 아들’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땅은 ‘늪’입니다. 그래서 딱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내 앞에 구원의 줄! 십자가를 딱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십자가 은혜, 말씀의 가르치심, 성령의 인도하심을 붙들고 ‘세상의 늪’에 빠져드는 ‘내 육신의 정욕’을 붙들어 매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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