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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5월 11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잠언 5장 1~23절



1. 잠언 5장을 기록하는 솔로몬의 심정을 가늠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기록했을 것입니다.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기록했을 것입니다.

말이 1,000명의 아내와 처첩이지 그가 이런 저런 방식으로 거느렸던 여인들의 숫자는 무슨 변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부유한 나라, 평안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다는 식으로 포장할 수 없습니다. 은근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의 급격한 타락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솔로몬이었지만, 그 받은 것을 가지고, 가서는 안 될 길로 갔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이해가 어려운 것이 없으실 겁니다. 다 이해가 되시고, 동의가 되시는 말씀일 겁니다.

18절의 기록처럼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을 과하게 해석해서 일명, ‘팔불출’ 소리를 들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의 행복과 가정의 평안을 위해 모든 남편(아내)들은 ‘자신의 배우자’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만 더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스스로 ‘난 아내를 사랑한다.’ 혹은 ‘처음 배우자와 잘 살고 있다. 배우자와 관계가 좋다.’라는 생각 때문에 ‘난 이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 또는 이 말씀이 적용되어야 할 다른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다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음녀(淫女, unchaste woman)’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솔로몬과 모든 남성들을 유혹하는 ‘음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여인’ 혹은 ‘결혼이라는 테두리 외에 만나는 모든 여성 혹은 남성’을 의미할까요? 더 나아가 ‘사탄 마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숭배하는 모든 행위를 의미할까요?

당연히 맞습니다. ‘음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여성 혹은 남성이 맞습니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탄 마귀’입니다. ‘사탄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유혹의 수단이 맞습니다. 우상 숭배로 표현되는 모든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가 맞습니다.

그런데, ‘음녀’의 정체는 더 교묘히 숨어 있습니다. 기름보다 더 미끄럽고, 꿀보다 더 달콤한 음녀의 유혹(3절)에 우리가 빠지는 진짜 이유가 ‘음녀’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음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zoor’의 뜻은 ‘합법적이지 않은, 금지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음녀’는 혼인관계로 맺어지지 않은 모든 여자(남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 문화에서 일부다처(一夫多妻 Polygamy)가 허용됐으니 솔로몬의 처첩은 음녀에 속하지 않는 것 아니냐?”라는 억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억지에 대답은 이것입니다. ‘zoor’의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낯선(unfamiliar)’입니다. ‘낯설다’가 어떤 의미입니까? 네, 말 그대로 ‘낯(얼굴)이 익숙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3. 잠시만, ‘낯선 것’을 접했을 때 인간 ‘마음의 상태, 감정’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 낯선 감정이 유혹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이 우리 마음에 침투하지 않던가요?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새로운 것, 처음 보는 것(여기에는 유무형의 모든 가치가 포함됩니다.)’에 대해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것들에 대한 ‘익숙한 감정’ 더 나아가 ‘질리는 마음’이 새로운 것에 대한 ‘낯 선 감정’이 엇갈려 교차하는 순간(dead cross) ‘낯선 것’에 대한 유혹은 더 강해집니다. ‘낯선 것’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감정에서 ‘새로운 것’이라는 매혹적인 감정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게 됩니다.

솔로몬이 그 수많은 여인들을 처첩으로 삼은 이유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젊어서 취한 아내(18절) 또한 말할 수 없는 풍성함과 축복이 일상이 되었을 때 찾아온 ‘새로운 것(이방 여인)’에 대한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익숙함’과 가나안 우상에 대한 ‘낯선 마음’이 엇갈려 교차하자, 영적 교차(spiritual dead cross)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처음 나를 구원하신 그 분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18절의 진짜 의미입니다.


5. 선악과에 대한 유혹은 하루 아침에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허락된 것들에 대한 익숙함, 지겨움 등 쌓이고 쌓였을 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너무 달콤했고, 너무 강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음녀’를 단순히 생각하면 ‘난 아니야.’ 또는 ‘그 사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녀’가 아니라, ‘낯선 것들’이라는 원래 뜻을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익숙함, 질림’은 조심해야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찾아온 ‘낯선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유혹은 치명적입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잘 점검해보면 ‘교회에 대한 마음, 예배에 대한 마음, 복음에 대한 마음’이 달라집니다. 찬송의 가사처럼 ‘나 처음 믿은 그 시간이 귀하고 귀하다’는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이야기할 때 지겨울 수가 없습니다. ‘또 그 말이냐’는 반응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의 모든 선택에도 적용됩니다. 주어진 것이 질리고, 익숙해져서 새로운 것을 찾지 않게 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유혹하는 세상을 이기는 힘은 십자가에 대한 새로움뿐입니다. 익숙함과 질림에 넘어지는 나를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붙들어 매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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