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무엘상 2장 1~10절
1. 이제 ‘룻기’를 지나 ‘사무엘서’를 묵상합니다.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상하권)’은 각각의 책으로 나눠져 있지만, ‘사사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흐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위대한(?) 왕’이 세워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 버린 인간들에게 다시 왕의 다스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가장 선하고, 완전하며, 아름다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왕권(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이 반드시 회복된다는 것을 ‘다윗 왕’을 세우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그토록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는 왕의 자리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밧세바 사건 등 부족함이 드러났습니다. 철저한 회개 가운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2. 마지막 ‘사사(Judge)’였던 ‘사무엘’은 마치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역할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왕’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먼저 보고, 준비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래의 어떤 일을 알아 맞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의 뜻을 알아맞힌 것을 대가로 종교적 숭배 혹은 대가를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드럽게 표현하려 애씁니다. 한마디로 ‘무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자신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버리는 사람입니다. 사사의 지위를 버린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제사장의 지위를 버린 ‘세례 요한’이 그랬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3. 많은 사람들이 ‘사무엘 1장’과 오늘 본문의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이런 ‘사무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한나’와 ‘사무엘’을 이해하려 합니다.
‘한나’, 아들 못 낳아서 서러움 당하다가 기도해서 불임을 해결한 어머니로 생각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탄생한 아들이 마침내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됐다. 두 왕(사울, 다윗)을 기름 부어 세우는데 쓰임 받았다.”라는 딱 인간 수준의 이해에 머뭅니다.
‘한나’가 정말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어머니(여인)이었을까요? 이런 여인을 성경에 기록해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려고 한 것일까요? 우리도 기도 많이 하면 이런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훌륭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생각에서 좀 벗어나야 합니다. 언제까지 성경(말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개인의 기복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까?!
‘한나의 기도’ 속에 담긴 ‘영적 지평(Spiritual horizon)’을 봐야 합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불임을 극복하고, 자녀 많이 낳고 잘 키워서 그동안의 서러움을 털어낸 한 여인의 속 시원한 탄성이 아닙니다.
4.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나의 기도’는 ‘누가복음 1장 67~79’절의 ‘사가랴의 기도’와 매우 유사합니다. 같은 영적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 역시 오랜 불임의 시간을 지낸 뒤에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 오랜 불임의 기간 동안 그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자식 없는 서러움에 시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실 메시야(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현실의 암울한 것들을 묵묵히 견딘 사람들입니다. ‘사사 시대’의 칠흙 같은 영적 어둠을 견딘 ‘한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아무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직 인간의 감각과 육체로 즐기고, 누리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였습니다. 종교 생활을 하는 이유, 우상을 섬기는 이유도 ‘오직 인간 중심의 자아실현’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5. 그때, 한 여인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았습니다. ‘한나’였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라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아들’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 주신 것’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에서 “원수(1절), 악인(9절), 대적하는 자(10절) 등”을 ‘브닌나(1장 2~7절)’라고 생각하거나, “교만한 말, 오만한 말(3절)”을 자신을 향한 비난의 말로 여긴다면 스스로 ‘영적 지평’을 좁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개인의 삶에 빗대어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 임하여 나의 문제가 획기적으로 해결되고, 축복이라 말하는 것들이 오는 것을 위해 기도해도 됩니다.
그러나, 말씀 속에 흐르는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거대한 영적 물줄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6. 한나의 첫번째 기도(1장 10~11절)을 다시 묵상합니다. 아들을 얻어 서러움을 되갚아주겠다는 얄팍한 종교 복수심에 기초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저, 귀하게 얻은 자식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무도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지 않고, 아무도 그 분이 베푸신 은혜에 감하사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만 쫓아가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품은 기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마음, 그 분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이 꿰뚫린 기도(1장 13절) ’였습니다.
개인의 안위를 위한 기도와 삶을 넘어섭시다. 하나님께서 ‘뉴저지주님의교회’를 통해 하실 아름다운 일(‘위대한’이라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을 위해 기도하고, 그에 합당한 삶(3절 하반절이 참 다가옵니다.)을 살게 되길 축원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