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2장 11~25절
1. 오늘 읽으신 본문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1~14절은 모세의 살인입니다. 15~22절은 미디안 광야 도피와 결혼입니다. 23~25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과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적어도 40년 이상의 세월이 녹아 있습니다. 동시에 120년을 살았던 모세의 인생(신명기 34장 7절) 중에서 중년에 겪은 인생의 굴곡에 대한 기록입니다.
일반적으로 모세의 생애(120년)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40세까지 애굽의 왕궁에서 살았고, 40세를 전후로 살인으로 인해 도피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80세 즈음 ‘떨기나무 사건’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에 근거합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나이를 “사십 세”라고 정확히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1절의 “모세가 장성한 후”는 사도행전 7장 23절의 “나이 사십이 되매…”와 연결됩니다.
2. 바로의 공주에 의해 양아들로 입양되어 자랐으나, 자신의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모세였습니다.
유모였던 친어머니가 모세에게 소위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너의 친모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히브리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양아들 삼은 바로의 공주도 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건 히브리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지 않았다면, 자기 동족의 압제에 대한 울분이 없었다면 11절에 기록된 행동(살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입니다. 11절은 우발적이라는 말로 어설픈 변명을 할 수 있지만, 12절은 더 이상의 변호가 불가합니다. 시체 유기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크게 두가지 생각 앞에 서게 됩니다. 첫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입니다. 이유는 출애굽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속사(救贖史, Salvation history)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종교적 대의명분 앞에 섭니다.
둘째는 “살인은 살인이다. 게다가 시체유기는 중범죄 중의 중범죄다.”라는 인정입니다. 내가 쓰임 받는 이유를 나의 과오에서 찾지 않는 태도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뒤 하루하루 이끌림 받는 것에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결과의 어떠함을 스스로 예상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신앙 인물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태도는 ‘첫번째’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나, 돌이켜 회개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는 경우는 ‘두번째’로 해석합니다.
출애굽기, 그것도 자신의 부끄러운 옛날을 기록하는 모세의 마음으로 이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12절은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습니다.
“쳐죽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nakah’는 ‘학살’로도 번역할 수 있는 잔혹성과 폭력성이 동반된 단어입니다. “감추니라”로 번역된 ‘taman’은 ‘숨기다, 감추다, 매장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4.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다시 인도하기 까지 광야에 잠시 머물던 어느 날, 파피루스에 한 땀 한 땀 모세 5경을 기록하는 모세의 마음으로 이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특히 11~15절을…
과연 그가 “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출애굽을 이끈 민족의 지도자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시내산 언약을 받기 위해 특별한 선택을 받은 구속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래서… 돌아보니… 나의 살인과 도피도 다 하나님의 뜻하심과 계획 속에 있었다.”라는 알쏭달쏭한 ‘자기 겸손’을 가장한 ‘자기 합리화’로 이런 것들을 기록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뜨거운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켰을 것입니다. 기록하다 무릎을 꿇어 엎드려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런 나를 쓰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모세의 마음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나의 죄악을 감출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당장 눈 앞의 모래에 숨겨두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들켰습니다. 사람에게 들키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들켰습니다. 그렇게 도망쳤습니다.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범죄한 뒤 나뭇잎으로 죄를 가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과 하와처럼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네, 저도 ‘아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시내산 언약 속에 담긴 대속의 은혜를 가장 먼저 체험하고, 그 언약을 가장 먼저 붙든 사람이 저입니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출애굽기 이후의 모든 기록을 읽지 않으면, 그저 모세 한 사람에 대한 신앙위인전 독서 수준에서 그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우리 언제쯤… 나에게 베푸신 십자가 은혜때문에 뜨거운 영혼의 눈물을 삼켰습니까?” 그 기억이 가까울수록, 또 그 기억이 오늘이라면 최고입니다.
모세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끝까지 붙든 모습이 그의 위대함 입니다. 이런 모습이 보이고, 이런 모습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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