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15장 16~32절
1. 2,000년 전 예수님은 죄악 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대속의 은혜를 매일, 매순간 붙들고 삽니다. 오늘은 역사 속에서 분명이 일어난 이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기록입니다. 16~20절은 예수님을 희롱, 조롱하는 군인들의 모습입니다. 2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간 ‘구레네 시몬’의 기록입니다. 22~27절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상황, 등장 인물(사형 집행자, 강도 둘)’에 관한 기록입니다. 29~32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표현하기 힘든 말로 비난하는 ‘그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2. 예수님께서 끌려가신 ‘브라이도리온(Praetorium)은 ‘장군의 천막’이라는 뜻으로 ‘로마 총독부 혹은 사령부, 관저’로 보시면 됩니다. 더 좁혀 말하면, ‘로마 총독부’ 안에 있는 ‘연병장’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16~17절은 상세히 이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곳에 ‘온 군대(전 병력)’을 모읍니다. 사열을 위해 모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냥 재미로 모은 것입니다. “쉬는 병력들 와서 구경해봐라.”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힙니다. 자색 망토였을 겁니다. 고가의 염료로 염색한 자색옷은 부유층만 입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군대에서 ‘자색옷’은 ‘왕, 사령관, 지휘관’이 입습니다. 머리엔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고, 침 뱉습니다. 예수님에게 말할 수 없는 희롱을 한 뒤 다시 예수님의 옷으로 갈아 입혀 ‘골고다’로 끌고 갑니다.
여기서 우리의 반응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뉠 것입니다. 첫째는 ‘조롱한 군인들’을 향한 비난입니다. “저 나쁜 놈들, 어떻게 예수님을…” 두번째 반응은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 대신 멸시천대를 받으셨습니다.”라며 마음 아파할 것입니다.
두번째의 반응이 옳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 걸음만 더 나가봅시다. 오늘 본문의 ‘군인들’이 예수님만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 침 뱉음과 희롱, 비방이 정말 예수님만을 향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저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너희 왕을 너희 손으로 내줬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18절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는 저들의 놀림은 겉으로 보면 예수님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유대인, 유대교 신봉자’들을 향한 놀림, 비방, 조롱입니다.
3. ‘군인들(이방인들)’에게 비춰진 ‘유대인들’의 모습은 정말 황당한 것입니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유대인 스스로 메시아라며 쫓아다니고, 왕이라며 환호하다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군인들(이방인, 세상 사람들)’ 손에 넘겨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겠습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세상 없이 거룩한 척하고,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종교 생활했습니다. ‘무리들’은 말 그대로 ‘메시야(구원자)’라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당장 목숨이라도 내 줄 것처럼 몰려다녔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밑바닥이 드러났습니다. 자신들의 종교를 가장한 정치적 이익이 위협 받는 순간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자신들이 진짜 예수님을 따라다닌 목적과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 앞에서’ 들통났습니다. 인간들이 종교 생활로 뒤집어쓰고 있었던 껍데기가 십자가에서 발가 벗겨진 것입니다.
4. 그런데 슬픈 것은 모릅니다. ‘군인들’의 조롱이 자기를 향한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입을 열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29~32절의 기록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이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29절,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친히 성전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비방합니다. 네, 성전이 건물로만 보이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30~32절,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니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셨음’을 모르니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종교 기적, 쇼, 퍼포먼스’를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믿겠다고 악악거리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군인들’은 ‘유대인들’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입니다. 이랬을 지도 모릅니다. ‘유대교’의 모든 종교 행위가 ‘속죄, 대속’에 맞춰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교인들’의 실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실망은 조롱으로 바뀐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 때, ‘군인들’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뭐라고 말할까요? 내 삶의 태도가 주님을 향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그들처럼 비치는 것은 아닙니까?
여전히 내 자아를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삶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고 외치는꼴이 됩니다. 종교생활을 버리고, “제가 십자가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못 박힙니다.”라는 생명의고백을 삶으로 드리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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