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6장 1~15절
1. 가끔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장과 절을 구분하는 숫자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성경 설명서가 아니라, 편지(특히, 신약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담아 기록한 편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앞부분과 계속 이어집니다.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 대한 당부와 약속이 이어집니다. 연결됨과 동시에 반복과 첨언을 통해 강조하고 계십니다.
1~4절은 ‘15장 18~27절’을 축약하여 반복한 것입니다. 5~15절은 ‘14장 25~31절’의 약속,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2.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와 그 이후에 있을 일(성령 강림)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모릅니다. 5절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말씀을 읽을 때, 제자들의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모른다’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모른다’라는 말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상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다’ 혹은 ‘믿음으로 기도한다’라는 것들의 대부분이 어떤 것입니까? 내가 원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으려 합니다. 믿고 싶어 합니다.
3. 안타깝지만, 위에서 말하는 믿음(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은 자기 욕심에 근거한 고집입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론, ‘자기 확신’으로 끈질기게 우기다가 덜컥 현실에서 원하던 그 일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온갖 들은 종교적 수식어를 갖다 붙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라는 마지막 종교 훈장을 스스로 수여합니다.
이럴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뭔가 이루어졌을 때! 그 사람의 반응과 영적 태도를 보면 정말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인지 아닌지 구별이 됩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이끄심이 지향하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13절).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완성된 대속의 은혜, 그 은혜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입니다.
4. 그렇다면, 성령의 임재와 그 능력이 우리 삶에 드러났다고 증명되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 세상에 속한 나와 그가 돌이키는 것’입니다.
8~10절에 기록된 ‘그(성령)가 와서’하시는 일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 내가 포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임금’은 마귀 사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탄의 음성에 반응한 내 자신의 간악함이 포함됩니다. 자기가 스스로의 왕이 되어 살기 위해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린 인간(나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삶을 돌아봅시다. 정말 하나님의 왕 되심이 우리의 삶과 전인격에서 드러나고 있습니까? (대답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
그러지 못한다면, 그러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가진 척이라도 좀 하고 살아야 합니다. 조금만 잘되고, 조금만 내 뜻대로 뭔가 이뤄진다 싶으면 티 내고 싶어 안달하는 이런 내 자신 때문에 십자가 앞에 엎드려 가슴 쳐야 합니다.
5. 성령의 임재로 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이런 내 자아에 대한 절대 절망 앞에 서지 못했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절대 소망 외에 붙들 것이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 깨달음과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받았다는 성령’은 자기 착각에 취한 종교적 쾌감(catharsis)일 뿐입니다. (실제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하나입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나는 죽고),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예수님만 보이고, 드러납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찬송(예수를 나의 구주삼고)의 가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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