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4장 36~53절
1.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36~49절)과 승천하시는 장면(50~53절)을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누가’가 기록한 또 다른 성경인 ‘사도행전’으로 이어집니다. (내일부터 ‘출애굽기’를 묵상하게 되지만, ‘사도행전’을 연속해서 꼭 읽어보십시오.)
2.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24장 13절 이하)’처럼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적 존재’로 부활하신 것으로만 이해했습니다.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와 고대근동의 종교, 사상, 문화의 배경 속에서 살았던 제자들의 한계였습니다.
3.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신적인 존재를 찾기 위해 만든 종교의 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믿는 것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부르지만,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종교일 수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왜냐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떠함으로 탐구하여 찾아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기독교’는 ‘생명’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4. 주일에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육체의 생명’조차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단순한 육체 기능이 활동하는 것, 멈춘 것으로 ‘육체의 생명’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 담긴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어떻게 사람이 설명할 수 있습니까?
위로부터 주어진 ‘생명’은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아니, 설명할 필요 없습니다. 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자는 분명히 압니다.
아이를 품은 어머니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속에 생명을 품은 어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압니다. 과학적, 의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 속에 생명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 누가복음의 기록자였던 ‘누가’의 직업은 의사였습니다. ‘36~43절’을 기록하는 그의 마음, 감격을 생각해보십시오.
어쩌면,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을 가장 믿지 못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가 이 증언들을 제자들에게 들으면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 쏟아지는 제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한정된 글로 표현하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정확히 기록했습니다.
바로, ‘42~43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분명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지신 ‘몸’은 지금 우리의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실체가 있는 완전한 새로운 몸이 재창조된 것입니다. 언젠가 이것을 나눌 때가 있을 것입니다.)
6. 그렇게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구약의 모든 예언의 말씀(대속의 은혜의 완성)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부활주일이 지났다고, 부활의 생명에 대한 묵상과 감격, 능력이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매일 매순간 십자가에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진정한 기쁨,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칠 때가 있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다시 십자가 앞에 설 때! 믿음으로 고백 되고, 내 속에 예수 생명이 나를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장악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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