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5장 18~27절
1. 요한복음 13~17장의 내용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는 ‘최후의 만찬’은 말 그대로 고별 식사 또는 배신자가 누구인지 말씀하시는 등의 침통한 분위기의 만찬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 앞에 허리를 숙이다 못해 무릎을 꿇어 발을 씻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과 다시 새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조금만 잘 나고, 잘 되면 뻣뻣하기 그지없는 우리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사람의 추켜세움에 자아의 고개를 한없이 들어올리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을 향해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두려움의 원인이 제자들에게 있지만,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14~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 마음을 붙잡고, 죽을 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멈추지 않고, 행함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내 뜻대로 될 때 스며드는 교만과 자기 의로움을 버릴 수 있습니다.
2. 사람의 자기 의로움 만큼 복잡하고, 교묘한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빨리 자기 자신에 대해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상대적 자기 겸손에 근거한 자기 의로움의 착각이 사라질 때가 십자가를 향한 여정이 겨우 시작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내 모습 때문에 발버둥치며 기도하십니까? ‘다들 그러고 산다.’라며 그냥 대충 넘어가십니까?
십자가는 못 박히는 고통 없이 붙들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결단없이 부활의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종교 유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내 자아는 십자가에 죽었다’라는 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이 없는 사람이 읽으면 자의적 해석으로 흘러갑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인한 고난, 박해, 핍박, 비난 등의 원인을 예수님에게 떠넘깁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대상을 무작정 악마화 합니다. 그렇게 정죄의 화살을 날립니다. 내가 정한 정죄의 대상을 함께 비난해줄 동지(?)를 찾으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난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입니다. 난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분명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보면 참 안타깝다는 드실 겁니다. 그런데…이런 모습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3. 이런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너무 달라집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사건에 면죄부를 줄 수 있습니다.
18~20절을 “예수 잘 믿는 사람일수록 비난과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주인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수많은 박해를 받으셨는데, 종인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라며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예수님 시대, 사도들이 살았던 시대와 같은 박해와 핍박을 당합니까? 성경이 기록한 그들의 삶을 따라가면 고난과 비난을 당합니까?
물론, 아주 제한된 특별한 경우가 있습니다. 기독교에 매우 적대적인 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와 여러분이 일상의 삶을 사는 곳에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당하는 비난과 비방이 더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현재 살아가는 세상은 도덕과 법률이라는 제어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놓고 물리적인 박해와 핍박을 가하지 않습니다. 비난과 비방도 수위를 조절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겁니다. ‘칭찬 속에 숨겨진 비난, 웃음 뒤에 감춰진 비웃음’이 우리를 향한 침묵의 박해입니다. 아니, 나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뒤집어쓰셔야 하는 쓰디쓴 미움입니다.
4. 안타깝지만, 사실을 말해야 합니다. 15장 1~17절이 말씀하는 진정한 십자가 복음, 그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18절 이하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저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포도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2절의 “내게 붙어 있어”라는 표현은 접붙여진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16~24절 참고)
자아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 죽은 가지입니다. 그 죽은 가지인 내가 십자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는 것은 그냥 포도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제 떨어져 나온 그 나무, 자아의 나무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런 믿음과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18절 이하의 말씀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세상도 제대로 포도가 열리는 가지를 좋아합니다. 그 가지와 그 가지에 열린 포도를 보며 ‘포도나무’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뉴저지주님의교회’와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열매’가 많이 맺히길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자아의 나무에서 잘려 나간 가지가 되어 십자가에 접붙여진 것에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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