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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28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시편 79편 1~13절


1. ‘시편 79편’의 표제를 보면 ‘아삽의 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헤만, 여두둔’과 함께 다윗시대에 성전에서 찬양대를 지휘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당시의 찬양대를 오늘날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기초적인 음악(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음률 수준)과 하나님을 찬양한 가사(시)를 기록하는 등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79편을 읽어보면 “다윗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나? 성전이 더럽혀진 사건 또는 예루살렘이 이방민족에게 침략당한 역사적 사실(1~4절)이 있었나?”라는 의문이 듭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봐서는 ‘예루살렘(남유다)’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B.C 586년 경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아삽’은 어떻게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요? 미래를 본 것일까요? 흔히, 말하는 예언을 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아삽’의 후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총 12개(50편, 73~83편)의 ‘아삽의 시’를 다윗 시대를 살았던 ‘아삽’, 한 개인이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같은 레위인이었던 그의 후손들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인 ‘시편 79편’은 바벨론 포로기 혹은 그 후에 돌아온 ‘아삽의 후손’이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에스라 3장 10절’을 보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아삽의 자손들이 성전 재건을 위해 기초를 놓을 때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복수에 불타는 감정에 치우치게 됩니다. “하나님,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처참히 짓밟힌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들을 철저히 응징해주세요. 뜸들이지 말고 빨리 하십시오.”(1~7절)라는 어린 아이 수준의 복수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8~9절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범죄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달라는 기도입니다.

3. 남유다를 비롯한 남북이스라엘의 죄악은 같은 것입니다. 조금 더 빨리(북이스라엘 B.C 722) 망하고, 좀 더 늦게(남유다 B.C568) 망한 것으로 ‘누가누가 좀 더 나은가?’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나마, 잘했다.’라는 평가를 받는 왕이 남유다에 더 많았다.” 또는 “그래도 ‘솔로몬 성전’이 예루살렘(남유다)에 있었다. 종교적 정통성은 남유다에 있었다.”라는 것으로 위안(?)삼고, 우월감 가지는 도토리 키 재는 식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뭐가 문제인지 아는 사람은 그저 8절의 고백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으면 매우 가련한 존재인 나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볼 때도 흔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주의 이름을 증거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건지셔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는 것’일까요?

11절의 기록처럼 “그들의 품에 칠 배”로 갚으면 됩니까? 기왕이면 70배쯤 갚으시면 안 되나요?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바벨론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참하게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페르시아(바사)에게 정복당하긴 했습니다. 전쟁과 성의 함락이라는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이 1년 6개월 이상의 포위 공격을 당한 것과 달리, 순식간에 무너짐으로 흔히 말하는 피의 살육과 학살 등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바벨론을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완성한 ‘고레스(키루스Cyrus 2세 )’는 타민족에 대한 배려와 종교적 관용으로 관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값없는 은혜를 입은 우리,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긍휼하심을 입은 우리는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가 무엇인지 압니다. “칠(완전수) 배나 갚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압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최고(best)가 아니라, 오직(ONLY)입니다. 여전히 죄인 나! 여전히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나! 여전히 보복이 구원의 수단 중 하나인 줄 아는 나! 여전히 이것 밖에 안 되는 나!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구원해주신 것만이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입니다. “완전함(7배)으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겸손은 십자가 은혜 입은 자의 가련함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살기 위해 달려가는 마음과 삶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도 ‘아삽’을 감동하신 하나님께 또 감사드립니다. 1~7절만 읽고 돌아서지 않은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피곤하여 그 우물가에 앉으신 예수님! 앞에 뻣뻣하게 서 있지 않겠습니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읊조리듯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다.’라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릎 꿇은 마음과 삶의 자세로 살기를 또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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