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2022년 수요일 묵상
- Hyung Yun
- 2022년 4월 27일
- 3분 분량
본문: 나훔 3장 1~19절
1. 예언서(선지서)를 전체로 다 살펴보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반복과 비유가 많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의 길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일관된 메시지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반복이 많다는 것은 간절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열어놓으신 생명의 길, 사는 길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비유가 많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림(영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뇌리에 새겨지도록 글과 말을 통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언서의 비유적 표현과 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본문은 기원전의 역사입니다. 거의 2,500년 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예언서들(대선지서 5권, 소선지서 12권) 중에서 ‘나훔서’는 읽는 이들에게 부담(?)이 됩니다. 이유는 뚜렷한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경고는 ‘멈춰라, 하지말라, 그만 두라, 돌아오라!’는 외침입니다. 그 외침이 들린다는 것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나서’를 통해 ‘니느웨’에 딱 한번의 기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서’의 경고가 들릴 때 ‘요나서’를 기억하고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이런 마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지만,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횟수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나훔서’같은 내용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너에게(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라는 착각, 자꾸만 누군가가 떠오르는 안타까운 착각이 들 때가 없으신지요?
3. 어제 말씀 드린 것처럼 선지자 ‘나훔’은 선지자 ‘요나’의 경우처럼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방문하여 선포했다는 기록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종교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 유다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가장 악한 왕인 ‘므낫세’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남 유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니느웨’는 ‘예루살렘’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드디어, 저 이방인들을 벌하시는구나.”라는 생각에 붙들려 있다면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8절에 기록된 ‘노아몬’은 고대 이집트 도시였던 ‘테베(Thebe)’입니다. ‘테베’는 원래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멤피스(Memphis)’가 앗수르 왕 ‘에살핫돈(Esarhaddon)’의 침략으로 도망치듯 옮긴 곳입니다.
나일강이 휘감아 도는 지형입니다. 적의 침략에 대한 방어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동맹인 ‘구스(에티오피아), 봇, 루빔(북아프리카 민족으로 추정)’이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8~9절) 그러나, 결국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에 의해 함락됩니다.
하지만, ‘니느웨’는 ‘노아몬’에 비해 방어에 매우 불리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견고한 성벽 정도가 다였습니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노아몬’에 비하면 성의 규모 등이 볼품없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8~17절을 통해 인간들이 붙들고 있는 모든 것! ‘이것만 있으면 나를 지킬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말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여전히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너뜨린 ‘노아몬’을 생각해라. 애굽 사람들은 ‘노아몬’으로 옮기면 안전하고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희가 함락 시켰다. 이것을 잊고, 너희는 ‘니느웨’라는 거대한 성과 그 성벽, 그 안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이 너희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루살렘(남유다)’ 사람들아 너희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이 말씀이 너희에게 가장 먼저 들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대체 ‘므낫세’야, 너는 나를 떠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 돌이켜 회개하고, 그 길에서 떠나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늘 마음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라는 저의 행위(?)를 통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말씀이 선포되는가?’입니다. (이 무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나훔서’의 기록과 그 선포된 말씀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남 유다, 므낫세…)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15권의 선지서는 2권(요나, 나훔)을 빼고 전부 여호와 하나님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남북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적 정통성에 목숨을 건다는 ‘남유다’를 향한 외침이 대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그 분의 십자가로 돌이키라는 메시지’는 오늘 나에게 가장 먼저 선포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지금 내가 기댄 것은 참 초라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대어 있는 것들은 거대한 난공불락의 성, 화려한 궁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땅을 향한 시선을 십자가 은혜, 그 변하지 않는 가치로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한 눈 팔려, 흔들리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려야 합니다.
‘니느웨’같은 어리석은 저를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다시 ‘요나서’의 은혜로 부르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만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