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나 1장 1~17절
1. 소선지서 12권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중 하나가 ‘요나’입니다. 주일학교의 단골 설교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의 이미지는 꽤나 강렬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거치며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큰 물고기의 크기를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3일을 견디다 되살아날 수 있는지 등의 합리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드러내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분명 ‘큰 물고기 뱃속’에서 생존했습니다. 거기서 기도했습니다. ‘스올(sheol)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2장2절)라고 말합니다. (Sheol을 꼭 지옥이라고 번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어두운 곳, 가장 밑바닥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빛이 임하지 않은 우리 심령의 밑바닥도 포함합니다.) 이 기도의 결론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2장 9절)입니다.
2. 요나서의 핵심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되살아난 기적의 사나이’가 아닙니다. 표적입니다. 가리키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고집(?)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의 열정과 의지가 요나 이야기에 녹아 있습니다.
‘니느웨’라는 잔혹한 이방 국가(앗수르)를 향해서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은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나서’에도 기록된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것’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38~41절’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요나’라는 선지자(사람)가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나를 통해 행하신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9~40절’을 다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너희들은 분명 구약성경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럼, 당연히 선지자 ‘요나’에 관한 기록을 읽었을 것이다. 설마, 그가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3일만에 돌아온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보여줄 표적도 똑같다. 십자가에서 죽음, 그러나 3일 뒤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내가 보여줄 참되고 유일한 표적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이것을 중심에 두고 요나서를 읽으십시오. 거기에 더하여 황당할 정도로 당돌한(뭐라 표현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요나’라는 한 개인을 좀 연구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 딱 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나’였어도 ‘요나’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실제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피하는 과정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저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며 살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욥바’는 ‘니느웨’ 정반대 쪽입니다. 정반대 정도가 아닙니다. ‘다시스’로 갑니다. 거기는 지중해 건너 스페인입니다. 당시 지중해 끝은 세상의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행하고, 달려가는데 기막힌 타이밍에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배’가 있습니다.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그 때는 정기 여객선 혹은 화물선 같은 배가 있었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침!’이라는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했을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길 열어 주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4. 길을 여신 것은 맞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으로 향하는 길, 결국 ‘니느웨’로 가야하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배가 출항할 정도로 좋은 날씨와 큰 폭풍이 닥치는 그 사이의 시간은 참 달콤했을 것입니다. 배 밑층에 내려가 잠이 들 정도였습니다. (폭풍이 일어난 것을 알면서 잠들었다기보다 이미 잠이 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요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결국, ‘니느웨’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9~12절)
무엇보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 선하심에 기초한 구원을 향한 집념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실 거 압니다. 저 원수같은 니느웨도 결국은 구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제발 나를 통해서는 하지 마십시오. 싫습니다. 거기 가는 것도 싫고, 입을 여는 건 더더욱 싫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꼴을 못 보겠습니다.”라는 마음이 그의 밑바닥에 분명 있었습니다.
‘요나서’를 보며 지난 저의 삶을 또 돌아봅니다. 여전히 남은 제 ‘스올’같은 제 심령의 밑바닥을 들여다봅니다.
넓게는 ‘니느웨’를 구원하신 것 같지만, ‘요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폭풍과 물고기 뱃속을 거쳐 결국은 ‘니느웨’에 발을 딛게 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신 것은 ‘요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점검합니다. ‘니느웨’가 아니라, ‘욥바’에서 마침!!!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있는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의 삶을 또 점검합니다. 그리고 ‘시편 139편 7~12절’을 함께 묵상합니다.
제 자신이 또 ‘스올’의 상황에 처한 그 영혼이 도망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들리게 되길 기도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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