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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21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출애굽기 9장 13~35절


1. 오늘 본문은 여덟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에 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애굽 땅에 우박을 내리십니다. 그 우박으로 인해 곡식과 나무가 황폐해집니다. 이것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하늘의 여신으로 섬기는 ‘누트(Nut)’와 곡식의 신으로 섬기는 ‘세트(Seth)’가 허상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재앙’의 목적을 심판 혹은 멸망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재앙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2. 재앙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너희가 섬기고, 너희가 믿는 그 신을 따라가지 말아라.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죽음(멸망)으로 인도한다. 진짜 창조주, 언약의 하나님, 나 여호와에게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재앙이 없어도 인간의 결국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 땅에서 애굽의 왕으로 산 것도 소용없습니다. 미라(Mummy)를 만들어 피라미드에 집어넣어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허망할 정도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바로(Pharaoh)’와 애굽 사람들을 애타게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3. 또한, 재앙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버려둠(abandonment)’입니다. 인간의 원래 운명인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죽음’에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Pharaoh)와 애굽 사람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위해 재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쓸어버리는 데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말 그대로 입김으로도 가능하십니다. 재앙을 통해 영적 질문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그 질문의 끝에 생명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게 하십니다.

10가지 재앙 속에는 부르고 또 부르시는 하나님, 참고 또 참으시는 하나님, 살리시기를 그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녹아 있습니다.


4.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참으심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모세와 아론을 만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절을 하고, 당장이라도 애굽을 떠날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다가 ‘바로의 탄압’이 거세지자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미워합니다. 저주합니다(출5~6장).

우리가 잘 알다시피, 출애굽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도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예수님도 죽였는데, 누가 누구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의 완악한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라는 고백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진지한 영적 고백이 있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언약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5. 오늘 본문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붙들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 혹은 무속인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20~21절). 심지어 바로(Pharaoh)는 회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27절).

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늘 서야 합니다.

‘당연히 구원이지, 천국이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지!’라는 뻔한 답(?), 학습된 답(?), 읊는 답(?)은 안 됩니다. 억지로, 굳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하라고 한다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예수님 만나는 그날까지 멈춰서는 안 됩니다. 아니,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춰지지 않습니다.


6.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바로(Pharaoh)의 실수(?)혹은 잘못(?)이라고 해도 될까요…? 27절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이번은”이라는 쓸데없는 말입니다.

정말이지, 제 마음에서 “조건 혹은 거래도 아니고, ‘이번은’이라는 바보 같은 말을 했을까”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고 안 하고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영역인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조건도 없이(그것이 구원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언약 안에서 죽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매일 매순간, 그렇게 끝까지 십자가에 붙들린 나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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