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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21일 2021년 목요일 묵상

본문: 출애굽기 10장 1~20절

1. 오늘 본문 속에는 답답할 정도로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바로(Pharaoh)의 모습이 보입니다. 애굽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13절 이하에 기록된 ‘메뚜기 재앙’이 닥치지 않아도 이미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고대 사회의 경제 기반인 농축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바로(Pharaoh)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3~6절의 말을 듣고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신하들이 오죽 답답하면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7절)라고 말했겠습니까.

그는 오히려 타협하려 듭니다. 협상하려 듭니다(8~11절). 물론, ‘메뚜기 재앙’이 일어나자 16~17절에 기록된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기응변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변명일 뿐입니다.

정말 회개했다면 16절에서 멈춰야 합니다. 17절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정말 인정한다면, 죄인됨에 대한 자기 선언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면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히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2. 물론,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너무 어렵고 까다롭게 말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질문도 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속에 담긴 깊이와 엄중함, 영적 무게감을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있습니까? 영접 기도 혹은 회개 기도가 종교 낭송문 수준이 된 것은 아닐까요?”라는 영적 질문이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10가지 재앙’과 관련된 ‘바로(Pharaoh)의 태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Pharaoh)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그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 그래야 극적인 탈출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결론을 아무런 묵상 없이 받아들입니다. 종교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저는 감히 말하기를… 단 한번도 “하나님, 제가 ‘바로(Pharaoh)’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제가 ‘바로’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을 가지고 10가지 재앙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특히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출12:29~30)’을 묵상해 보십시오. 17절에 기록된 그의 말처럼 ‘죽음’이 그를 피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17절이 임기응변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장자의 죽음’을 ‘처음 태어난 어린! 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처음 태어난 남자의 죽음’입니다. 성인도 죽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Pharaoh: 애굽 왕을 칭하는 일반명사)’가 선대 왕(Pharaoh)의 장남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장남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아들은 죽었는데, 죽지 않은 나를 발견했을 때 마음의 상태가 어땠을까요? “난 왜 죽지 않았지? 이게 뭐지? 왜 나는…?”라는 절규에 가까운 내적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죽은 아들을 안고 단순하게 “나 때문에 네가 죽었구나.”라는 신세 한탄에 가까운 처절한 후회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귀에 들여오는 살아있는 사람(장자)들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대신 죽은 어린 양’과 ‘그 피를 바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에게 영적 의문과 지진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꾸만 그의 심령에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 아들이 죽었구나. 나 대신 아들이 죽고, 내가 살았구나.”라는 고통 섞인 영적 자각이 스며 들었을 것입니다.

4.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1절의 “나의 표징”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표징’ 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 증표, 기적 등이 아닙니다. ‘구별되는 점, 특별한 점, 독특한 점’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언약’입니다. “죄인됨을 인정하고 내가 베푼 대속의 은혜를 믿고 돌아오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 것이다.”라는 언약의 독특성, 특수성이 “나의 표징”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사실, ‘10가지 재앙’을 가지고, ‘치시는 하나님’이라는 권선징악적 해석 또는 ‘바로(Pharaoh)를 완악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운명론적 해석으로 설명하면 수월합니다. 바로(Pharaoh)는 세상과 사탄을 상징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고 본문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에게 이번 10가지 재앙 묵상은 특별(?)했습니다. “제가 바로(Pharaoh)입니다. 그의 어리석은 말과 선택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 십자가를 붙들게 하신 것을 돌아봅니다. 그 때 아무것도 모르고 바로(Pharaoh)처럼 내뱉은 16~17절의 말조차 긍휼로 받아 주셨음을 믿습니다.”라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바로(Pharaoh)로 살기보다 ‘수많은 잡족’ 속에 섞여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가겠습니다.”라는 읊조림이 그냥 흘러나왔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흘러나온 이런 저와 여러분의 읊조리는 작은 신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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