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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20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요한복음 21장 15~25절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아침 식사(떡과 생선)를 마쳤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물을 던졌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해주신 아침을 먹은 뒤 졸음이 몰려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물으십니다. 베드로를 향한 너무 유명한(?) 질문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필,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15~17절의 대화가 오갈 때 ‘베드로’의 심정은 말로 설명이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적어도 지난 3년의 시간이 필름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2. 게다가 지금 앞에 타오르는 것은 “숯불(9절)”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입니다. 원래 너와 나의 모습이 어떠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숯불”로 번역된 ‘anthrakia’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사용됩니다. 그 두 번 모두가 ‘베드로’와 연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장면의 첫 시작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8절’입니다. 추위 때문에 피운 ‘불(anthrakia)’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추위 때문에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숯불(anthrakia)’가 있습니다. 그날 그때처럼 새벽 추위만 녹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린 배까지 채웠습니다. 다른 음료는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정상이라면, 뜨거운 눈물과 함께 떡과 물고기를 삼켰을 것입니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면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장면에 녹아 있는 영적 감정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3. 이런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 전인격과 영혼의 무릎을 꿇고 통곡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단순한 인간의 감정, 성향 등에 기울어진 눈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흘린 눈물 방울, 북받치는 감정에 속으면 안 됩니다.) 꿇은 허벅지 위에 떨어진 눈물, 꿇어 엎드려 바닥을 적신 눈물만큼 달라진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가슴을 쥐어뜯는 베드로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지 못해(그러나, 온 마음을 다하여) 내뱉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하시나이다.”라는 대답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말 만났다면, 15절 이하의 영적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적 갈등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화의 과정 자체가 영적 갈등입니다. 여전히 남은 자아의 두 마음과 싸우는 것입니다. 옛사람(시몬)을 새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이기는 삶입니다. (새사람을 ‘베드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양을 먹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양을 먹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사명감에 불타는 것이 아닙니다. ‘숯불’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이렇게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는 영혼의 태도와 그 영혼의 태도에 합당한 삶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18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삶’은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 인도함 받는 것이 기쁜 삶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기의 원하는 것, 자기가 그려 놓은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이루려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자기가 생각한 인생에서 조금 모자란 듯 이루어진 것을 위안(?), 심지어 겸손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뭐, 인생이 내 뜻대로 되나… 모자란 듯 되는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의 자기 위로를 하나님께서 적당히 이루어 주신 나름 신앙적인 삶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혹시, 우리가 그런 생각으로 위로를 받으려 한다면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5.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갔는데, ‘이 땅의 고난’ 밖에 없다면 정말 따라가시겠습니까? ‘베드로’와 ‘사도 요한’처럼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의 대답을 생각하지 마시고, 본인이 어떻게 대답하고 반응할 것인지만 생각하십시오.)

이젠 이런 말씀 전하고, 이런 말씀 붙들고 죽을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람보다, 적당히 좋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 요한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은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내 생각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짜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이끌어 주시는 방향으로 매일 한 걸음을 내딛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제 자신을 봅니다. 사실은 따르는 것이 싫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 같아서.

그러나, 여기까지 따르게 하셨기에 마지막까지 저를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 붙듭니다.

오늘 나를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신 은혜를 붙드는 가운데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삶’을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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