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9장 1~12절
1. 오늘 본문은 10가지 재앙 중 다섯, 여섯째 재앙인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경을 고대의 역사적 기록으로 보는 학자들은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재앙을 해석합니다. 실제, National Geographic에서 방영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석이 영화(Exodus: Gods and Kings)도 등장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을 악의적인 왜곡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 혹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세계의 주관자이십니다. 초자연현상을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자연현상의 질서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따라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나타난 눈에 보이는 현상에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그 순간,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 당시 애굽인들이 섬기는 것들이 신(神, god)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 신(God)이라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0가지 재앙은 ‘신들의 능력 대결’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애굽이 섬기는 우상들(나일강, 개구리, 각종 가축, 태양 등)을 무력화시킨다는 단순한 이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이 신적 존재를 만들어 섬기는 이유는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앞에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구원자’를 찾습니다. 그것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저런 종교, 신화, 미신 등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대의 이집트(애굽)로 대표되는 모든 문명과 인류에게 ‘언약의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고 계십니다. 두려움을 바탕으로 신적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를 통해 구원 받으려는 인간에게 ‘행위의 어떠함’이 아니라,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0가지 재앙’은 그 과정의 일부입니다. 약속(언약)에 의한 구원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3. 지금까지 재앙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고통과 괴로움이 있었을 뿐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가축은 죽었지만,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이게 뭘까? 지금까지 우리가 섬긴 것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라는 허탈감, 허망함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암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뭔가 다른 것, 뭔가 영적 의문을 품은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넷째 재앙(파리 떼 재앙)부터 ‘구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8장 22절).
그때는 우연인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가축이 죽는 것’을 통해 확연히 달라집니다. 4절의 기록처럼 ‘구별’이라는 단어가 애굽 사람들 머리 속에, 아니 가슴 속에서 떠올랐을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6절)는 것이 우리에겐 기록이지만, 그들에겐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4. 여호와 하나님의 구별은 결코 ‘혈통’ 혹은 ‘종교적 전통’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약속을 붙든 자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즉, ‘가죽의 죽음’을 보면서 이스라엘 자손들 역시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들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10가지 재앙의 마지막, 장자의 죽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은 ‘이스라엘 백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입니다.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引防)에 바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출12:21~23)을 믿고 행한 사람은 그 재앙을 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10가지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보고, 겪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도 점점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가까이 간 것뿐입니다. 잘못된 선택의 우월감에 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갔습니다.
5. 저와 여러분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은 인간이라면 겪었고, 겪고 있고, 겪을 수 있는 동일한 삶의 여정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바로(Pharaoh)’처럼 마음이 완악하고, 완강해져 갑니다. 자기 의로움이 더 쌓여갑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닐 수록 종교인의 모습이 더 굳어져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 삶에 나타나는 재앙(?)같은 상황을 통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고개가 갸우뚱거려지고, 어렴풋한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 믿음으로 생명의 길을 택하는 길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미래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게 허락된 삶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나의 익숙함과 본성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십자가에 합당한 선택을 하는 것이 최후 승리를 향한 삶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녹아 나를 내려놓는 선택을 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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