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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20일 2020년 월요일 묵상

본문: 에스겔 37장 1~14절

1. 에스겔 37장은 에스겔서의 절정입니다. 이 회복의 역사, 생명의 역사, 다시 살리심의 역사를 말씀하시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심판을 통해 돌이키게 하시고, 정결하게 하심으로 ‘새로운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은 에스겔서에 기록된 네번째 환상입니다. 이 환상은 흔히 기도 좀 한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 기록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성경 66권이 완결된 이후 ‘특별계시’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깨닫는 것’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입니다. 어두운 우리 영적 눈을 열어 주셔서 바르게 말씀을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른 뼈 환상’을 대할 때도 ‘성령의 비춰주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 어두운 심령, 죄악된 본성이 성령의 밝히 비춰주심 앞에 드러나지 않은 채 말씀을 대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적용’이라는 기독교 용어에 얽매여서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 ‘사람의 능력으로 도무지 넘어갈 수 없는 사건’등을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2. 오늘 본문은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썩다 못해, 말라버린 뼈’같은 범죄타락한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되살아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1절을 보시면,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에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에스겔’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그의 영이 “골짜기 가운데”로 이끌림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힌놈의 골짜기(시체 유기장소)’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정확한 지명이 없기에 굳이 어디인지 알 이유는 없습니다. 고대에는 전쟁과 전투가 일어난 뒤 시체는 거의 유기했습니다. 게다가 에스겔이 환상을 본 시기는 바벨론이 정복전쟁을 한참 수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전투 현장에 내버려진 시체가 많았을 것입니다. (2절)

4절을 보시면 “마른 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 속에는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과 함께 ‘시간이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가 아주 오래 전 부터 였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 죽어 버린 지가 너무 오래되었음을 안타깝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마른 뼈들(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다시 살리십니다. 더 엄격히는 ‘재창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른 뼈’를 가만해 생각해보십시오. 마른 흙과 다름없습니다. 만지면 먼지가 되고, 흙으로 부서져 버립니다. 그대로 두면 그냥 흙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7~10절)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 혹은 영원한 생명을 ‘내 자아가 환생’하는 수준으로 이해합니다. 내가 신적 자아로 재탄생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14절의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를 보십시오. ‘둔다는 것’은 ‘존재적 장악’입니다.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 대신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완전히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실, 부활을 통한 재창조는 인간 언어로 표현하고,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저는 더 성경의 진리를 믿습니다. 도저히 제 이성으로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는데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이해가 불가능하기에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 믿음이 임하면 또 이해가 됩니다.

4. 하나님은 나의 절망 위에 역사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라는 자기 고백, 자기 절망이 있습니다.

물론, 절망으로 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절망은 세상이 말하는 ‘절망’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범죄타락한 인간의 ‘존재적 절망’ 앞에 서는 것입니다.

네, 십자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앞에 서서 ‘나를 냉정히 보십시오.’ 그래야 살리시는 뜨거운 피가 내 영혼에 스며 듭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13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으로 소생케 되는 신비, 놀라운 그 능력이 저와 여러분, 우리 가정, 삶의현장에 넘쳐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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