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23장 13~25절
1. 오늘 본문을 대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인간의 간사함이 너무 잘 드러납니다. 불과 몇일 전 예수님을 향해 그토록 환호하던 사람들이 돌변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28절 이하에 기록과 오늘 본문을 다시 함께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로 읽지 말고,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제가 그때 그들입니다.’라는 깊은 영적 자각과 인정을 품고 읽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굳어버린 ‘빌라도’를 향한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굳어버린 그 마음을 버리고 봐야 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2. ‘산헤드린 공회’를 시작으로 ‘빌라도’와 ‘헤롯 왕’을 거친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에게 끌여 오십니다. 끌려 다니시던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결과적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재판의 과정을 보면 ‘빌라도’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없습니다.
물론, 빌라도는 로마의 법체계마저 어긴 졸속 재판을 했습니다. 민란이 날까 두려워 예수님을 처형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합니다(마태복음 27장 24절).
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결정한 빌라도의 행동과 결정은 분명 잘못 된 것입니다.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짓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자기 이익을 위한 정치적 계산에 익숙한 그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빌라도’는 그냥 인간입니다. 죄성을 가지고, 자기 이익과 이미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 사람입니다.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살아온 인간에 불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람, 신앙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통해 ‘자기 가치 실현’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데, ‘빌라도’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 좋은 사람, 믿음 좋은 사람, 신실한 사람 등등’의 표현처럼 허망한 것이 없습니다.
4. 그냥 다 똑같은 죄인들이 모여서 ‘상대적 잘남’을 가지고 서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습니다. 신앙 좋지도 않고, 신앙 좋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는 저 사람보다 낫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처럼 황당한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쓰고 있는 제가 가장 남을 많이 판단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포장합니다. ‘말씀을 가르친다. 설교한다. 목회한다.’라는 이유로 저에게 면죄부를 남발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부끄러움입니다. 여기서 해방되려 하기보다 이 고민과 기도를 끝까지 안고 가려 합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면서 ‘상대적 의로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까지 가지고 온다면, 교회에서마저 그런 ‘상대적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절대적 의로움’을 짓밟는 것입니다.
5. 오늘 본문을 또 읽어보십시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빌라도와 로마 병사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쫓아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제사장, 서기관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이 원하는 왕의 모습으로 세우고 싶었던 ‘무리들’에 의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역사 이래로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 성경에 대한 공격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는 ‘사탄의 계략’에 반응한 ‘비기독교인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들의 공격에 먹이감을 제공한 기독교인들의 잘 못입니다. ‘나 대신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 자기 부인(Self-denial)’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아 실현의 도구로 이용함으로 드러난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 형태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는 그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 소망 품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실제 삶의 태도와 심령의 상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기독교 종교인들 때문입니다.
6. 저도 ‘나는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당신도 위와 같은 위선적 기독교인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그냥 고개 숙이겠습니다. (제가 설교한 대로, 성경을 읽은 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정말 이런 찔림과 부끄러움을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여전히 죄인 된 나’를 인정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네, 바로 그때 예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가 임합니다.
“주님, 그때 그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제가 그 사람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제발, 이런 말이 익숙해지지 않길 바랍니다.)”라며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린 저와 여러분을 십자가의 피 묻은 손으로 일으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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