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겔 34장 1~16절
1. 오늘 본문을 읽은 후,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유다의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적나라한 지적 앞에 제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2절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왕, 제사장 등’을 의미합니다. 소위 말하는 ‘통치자, 지도층’들입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이라는 표현이 오늘날로 적용된다면 당연히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경제 각 계 각층의 지도자들’ 그 중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둘러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적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상세합니다. 2~4절에 묘사된 ‘지도자들’의 행태는 부끄럽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5~6절을 통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 방황하다 들짐승의 밥’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7~8절은 버려지고, 흩어지고, 노략의 대상이 되어버린 ‘양 떼(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남유다의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목자들(왕, 제사장, 지도자들)’ 때문이었습니다.
2. 사실, 더 무서운 말씀이 9~16절입니다. 물론, ‘양 떼’의 입장에서는 무서운 말씀이 아니라, 은혜와 회복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목자’로 부름 받은 ‘지도자들’에게는 정말 두려운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목자들의 손에서 양 떼를 도로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3~14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본토(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좋은 꼴을 먹이시고, 높은 산에 두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5~16절에서 친히 ‘목자, 치유자, 회복자, 다스리는 자가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자기 의로움을 섞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복음과 관련된 일에 사람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교회가 종교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라 믿는다면 인간의 이름이 그 냄새를 풍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목자’보다 ‘양떼’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목자’도 양떼입니다. 그런데 만약 ‘목자’ 스스로 ‘양떼’ 중 ‘한 마리’라는 것을 망각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3. 저는 3절을 가만히 보면서 겉으로 드러난 ‘목자들의 포악함, 간사함, 패역함’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목자들… 소위 교회의 지도자들(저 같은 목사들)이 왜 3절에 나타난 저런 행위를 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서도 뻔뻔스럽게 ‘목회’한다고 말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3절의 기록 그대로입니다.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털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목회자들의 사치, 탐욕, 위선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럼,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기름’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 털’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다 태워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4장의 속죄제 규례를 보면 ‘속죄로 드려지는 제물’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어 불사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름’은 당연히 죄를 상징합니다. 그것 만이 아닙니다. 제물은 고기, 가죽, 배설물까지 완전히 다 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죄제사 규례를 읽어보면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저렇게 다 태워드릴 거 그냥 통째로 태워서 바치라고 하시지 왜 저렇게 상세하게 말씀하셨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태워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숨은 죄, 감춰진 죄, 드러나지 않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십자가 앞에’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4. 그런데, ‘목자들’이 기름을 먹었습니다. 털을 입었습니다. 네, 그들은 종교행위만 했습니다. 왕들은 왕관을 쓰고 제사를 참관만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종교행사만 진행했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먹은 것입니다. 거룩한듯 보였으나, 종교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살았습니다. 털을 입은 것입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여전히 기름을 먹고, 털을 뒤집어쓰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은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의 패역함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십자가의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신 ‘초림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에 붙잡히는 그 어떤 것에 소망두지 마십시오. (그것이 보이는 교회, 목회자, 축복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유일한 생명과 소망은 반드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이심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오직,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살진 꼴을 먹이고, 내 품에 누워 있게 하리라.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를 찾으리라. 상한 자를 싸매 주리라.”(15~16절) 약속하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참 믿음과 생명 가운데 강건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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