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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4월 14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출애굽기 5장 1~21절


1. 오늘 본문을 보면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려는 끈질긴 사람의 습성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노예의 삶이 힘들어 고통에 신음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되었다.(출2:2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가 행한 이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는 말에 머리 숙여 경배하였습니다(30~31절).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읽으신 그대로입니다. 노역이 가중되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21절).


2. 오늘 본문은 이해가 어려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우리가 생각한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누구나 한번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컬컬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마음의 컬컬함이라는 조금 순화된 표현을 써봤습니다.)

사실, 모세는 ‘바로’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태도는 예견된 것입니다. 2절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라는 말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 히브리 사람들’이 믿는 신(神)의 존재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신전, 조각하여 만든 우상 하나 없는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神)’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니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제 자신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의 삶과 인격적 태도 혹은 비도덕적 삶의 결과로 따라오는 무시와 멸시는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3. 사실, 모세가 싸워야 하는 상대는 ‘바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에 깊이 뿌리 박힌 ‘노예 근성’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하나님을 향한 무시’와 이스라엘 백성 마음에 자리 잡은 ‘노예 근성’은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이 같습니다. 이 두 마음의 본질은 ‘보이는 것, 육체의 것’입니다.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이유는 애굽의 신들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육체로 보고, 만지고, 누리는 어떤 것이 없는 신적 존재, 그런 것들을 줄 수 없는 신(神)은 필요 없었습니다.

게다가 노예 생활하는 별 볼 일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신(神)은 무시당하기 딱 좋습니다. 아니, 무시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전해진 기독교, 예수님의 복음을 세계 최강대국 선교사가 아닌, 빈곤국의 선교사가 전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나섰을까요? 이런 질문을 좀 자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4장에 기록된 이적과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을까요? 그들이 ‘머리 숙여 경배한 이유와 대상이 무엇입니까? 혹시 ‘능력의 지팡이’와 ‘사람 모세’아닌가요?

저는 감히 ‘그렇다. 그들이 머리 숙인 대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육체로 누리는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그들의 집착은 시내산 바로 밑에서 만든 ‘금송아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된 우상숭배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5. 이런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인정해야하는 이유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자아에 대해 절망’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이끌려 멸망을 향해가는 인간의 본성을 철저히 인정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절)라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자기 절망의 탄식을 터져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그 절망에 내버려 둠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 절망에서 나를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십자가의 절대 소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을 읽어보십시오. 적어도 7장21~8장 2절은 꼭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십시오.)


6.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육체 속에 포함된 인간의 이성과 감정 따위로 이 땅에서 누리는 것에 마음이 팔려 예수님을 따라간 무지한 저 같은 사람도 여기까지 이끄셨습니다. 순간순간 넘어질 때가 있지만, 또 십자가의 생명으로 끝까지 인도해주실 줄 믿습니다. (15~21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침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이 십자가의 생명에 붙들려 내 본성의 익숙함 반대 방향으로 한걸음이라도 내딛는 귀한 날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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