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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202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요한복음 18장 28~38절



1.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유대 지역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이 장면에서도 종교인들의 지독한 이중성, 종교성으로 가려 놓은 그들의 간악한 본성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유월절’을 핑계 삼는 것입니다. (28절) 유월절이라는 자신들의 최대 명절을 율법을 어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 ‘빌라도의 관정(Praetorium, 로마군 사령관의 본부 또는 총독 거주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가까이하여 더럽혀 지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관습이 말하는 깨끗함으로 종교 명절(유월절)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행위 또는 반역에 대해서는 직접 재판하고 사형 등의 형벌을 집행했습니다.

그러나, 피지배국의 문화와 관습에 따른 민간의 처벌을 적당히 묵인했습니다. 특히, 종교적 관행에 따른 재판과 처벌이 로마의 법과 이익에 해가 되지 않을 경우는 눈 감아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행전 7장에 등장하는 스데반 집사의 처형입니다. 분노한 유대교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칠 때, 로마 군인들(빌라도 포함)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1절에 빌라도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대화가 오간 것입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계략은 예수님만 걸고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 역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이라는 꼬리표를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에게 붙였습니다.

이리저리 엮어 놓고 자신들은 빠져나가려 했습니다. 자신들은 빠져나가지만 그들이 원하는 결과(예수님을 제거하는 것)는 이루고 싶었습니다.

2. 어떡해서든 자신이 원하는 결과는 이루고 싶은 인간, 그러나 종교적 관행은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종교 규례를 지켰다는 명분(28절)을 뒤집어 쓰고, 남의 손을 빌어서라도 제거하고 싶은 대상에게 대신 칼을 휘둘러줄 누군가를 찾는 이유(31절)가 무엇일까요?

네,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고상한 표현입니다. ‘찝찝함’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겁니다.

“너무 이렇게 하고 싶은데… 이렇게 했다가 큰 일 날 것 같은데…”라는 꺼림직 한 마음! “왠지 모를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들지만, 결국 “아 몰라! 뭐 어때!”라며 해버립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스멀스멀 찝찝함이 올라옵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는 묘책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 행위에 기대는 것입니다. 종교성과 인간의 의로움을 바탕에 둔 선행과 열심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사람의 시선을 양념으로 가미하면 좋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또는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입니다.

생각보다 이런 식으로 교회 나오는 사람들, 교회에서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이런 마음으로 어떤 일을 결정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결정에 앞서 제 본심을 십자가 은혜로 들여다 보고 파해치는 시간이 참 어렵습니다.)


3.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십자가 복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종교 상징 또는 무속 신앙의 부적(符籍, talisman)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종교 상징으로 여기는 것과 ‘참 생명의 복음’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죽음입니다. 이런 나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 생각, 그 욕망, 그 본성에 대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기쁨인가, 아닌가?’만 고민하면 됩니다.

그 영적 고민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 반대로 행할 수 있는 은혜와 믿음이 이미 임했음을 믿고 결단하며 행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4.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한 첫 마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절 이하)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요한복음을 읽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 특히 그 중에 유대인 개종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저는 빌라도가 아니, 예수님께서 “정말, (나)예수가 너의 왕이냐?”라며 저에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제 마음 속에 망설이는 듯한 “네…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에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네 스스로(진정한 고백,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이 동반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너에게 한 말(귀로 듣고, 머리로 받아들이고, 사람 눈에 보이려는 종교 지식)이냐?”라고 말입니다.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성경, 그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믿으신다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길에서 돌이키길 바랄 뿐입니다.

십자가를 부적 삼아 내 삶의 문제 곳곳에 붙이는 행위는 예수님을 이리저리(안나스, 가야바, 빌라도…) 끌고 다니며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그들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시십니까? 아니면, 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못 박고, 내려놓고, 끊어내고, 버리십니까?” (작은 차이 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끌고 다니지 않고, 예수님에게 이끌림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삶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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