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4장 18~31절
1. 출애굽기 3장, 4장을 통해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과 머뭇거리는 모세 사이의 영적 긴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록이 그 정도라면 실제 이야기의 폭과 깊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며, 천천히 몇 번을 반복해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가진 모세가 다시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향하는 기록입니다.
이 장면에서 흔히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의 손에 들린 지팡이’입니다. 그냥 지팡이가 아닙니다. ‘능력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물론, 요술 지팡이, 도깨비 방망이 수준은 아닙니다.)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단순한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영적 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며, 보증입니다.
2.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 조금 유심히 봐야할 장면이 있습니다. 먼저는 19~23절입니다. 모세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위, ‘능력의 지팡이’가 손에 들려 있었음에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출애굽기 2장 15절의 ‘바로, Pharaoh’)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위해 하나님은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바로(Pharaoh)의 완악한 마음’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21절). 23절에서는 ‘10가지 재앙의 마지막(장자의 죽음)’을 미리 암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임을 약속해 주십니다.
네, 손에 쥔 ‘능력의 지팡이’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약속과 위로가 두려워하는 심령을 일으켜 세웁니다. 여전히 불안한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을 줍니다. 굳건한 믿음위에 서게 합니다.
3. 그렇게 모세는 애굽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아내(십보라)와 두 아들(게르솜, 엘리에셀)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려 합니다. 이것을 목격한 아내, 십보라가 돌칼을 만들어 아들의 할례를 행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줍니다(24~26절).
이 부분에 대해 다양한 적용과 해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난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보라’에게 영적 시각, 소위 영안(靈眼, Spiritual vision)이 열렸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할례’입니다. 종교적 의미의 ‘할례’가 아니라, ‘할례’의 참 의미에 집중해야 합니다.
4. 말그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능력도 받았습니다.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려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할례를 받지 않은 모세의 아들 때문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이스라엘의 종교행위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이 아닙니다.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은 할례의 참 의미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참 의미를 잊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잊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할례를 통해 모세는 다시 깨우치셨습니다. “너는 죽었다. 네 생명의 주인은 나 여호와다. 너는 어떤 종교적 사명을 받아 애굽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애굽에 가는 것이 아니다.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구하러 애굽을 향해 가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신 사건이 24~26절입니다.
5.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거창한 사명을 받아도,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아무리 엄청난 축복을 받아도 소용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매일 매순간 영적 할례를 받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것, 훌륭한 것, 좋은 것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이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킵니다.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일도 십자가에서 걸러진 것이 아니면, 뜻 밖의 결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문제, 아니 요즘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고민하지 않으려는 것’에 있습니다. 내면의 영적 갈등을 피하려 합니다. 조금만 부대끼고, 어려우면 쉬운 길을 찾습니다. 편한 방법, 익숙한 방법을 따라갑니다. 삶의 유희, 종교적 유희를 추구하며 삽니다.
물론, 갈등이 심하여 우울증에 걸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부인(否認, Self-denial)할 때 하늘로부터 참 기쁨이 승인(承認, approve)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깊은 영적 고뇌와 갈등을 거치지 않은 허망한 것들을 버리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거친 참 기쁨, 은혜, 사랑, 능력을 마음껏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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