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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27일 2020년 금요일 묵상

최종 수정일: 2020년 3월 28일

3월 27일 2020년 금요일 묵상

본문: 마가복음 11장 1~19절

1.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 마을인 베다니와 벳바게 즈음에 이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나귀 새끼’를 데려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과 나귀를 내어준 사람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스가랴 9장 9절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맞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두 제자’ 또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나귀 새끼’를 내 준 사람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개선장군이 타는 ‘군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겸손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2.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십니까? 또 예수님은 마음이 어떠실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친히 어린 양이 되셔서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를 향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기계적으로 떠오르는 ‘제자들의 순종, 예수님의 겸손, 예루살렘 입성’ 등의 단어를 제거하고 봐야 합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봐야 합니다.

7~8절, ‘겉옷을 안장 대신 깔고, 길에 나뭇가지와 자신들의 옷을 펼쳐 놓는 사람들’의 열열한 반응과9~10절,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며 찬송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수많은 인파들의 함성소리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그들의 환영과 환호에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물론, 저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삶과 고백 전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와 옷을 깔았던 사람들과 침 뱉고, 조롱하고, 욕하던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 같은 인파입니다. 유대인 최고의 명절에 몰려든 같은 군중이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단 5일만에 사람들은 돌변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왕’의 모습이 아닌, 죄인의 신분(흠 없는 어린 양, 대속의 제물)로 대제사장의 뜰,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 그렇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필요 없었습니다.

3. 정말이지 십자가는 관심 없습니다. 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오병이어, 칠병이어, 병자 치유, 수많은 인파로 드러나는 어떤 힘, 세상의 영향력’ 등에는 관심이 있지만,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한 구원은 관심 없습니다.

성경을 전체로 보지 못하면 이런 오류는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성경이 기록되어 전체를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부분을 보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15~19절의 ‘성전 정화’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을 “예수님도 화를 내실 때는 화를 내셨다.”라며 자신의 화를 ‘거룩한 분노’로 포장하는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화를 낸 것은 회개할 일이지, 예수님을 빙자해서 얼렁뚱땅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본문을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질타하는 것으로만 적용하거나 이해하면 반쪽만 이해한 것입니다.

작년 ‘요한복음’을 살펴볼 때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요2:15), 여기서 채찍은 영화에서 카우보이가 휘두르는 그런 채찍이 아닙니다.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형벌 도구’가 아닙니다. 소, 양, 염소 등 가축을 몰기 위한 ‘목자의 도구’입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 이하’에 기록된 ‘성전 정화’의 문맥을 가만히 읽어보십시오. 현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끈으로 목자의 도구’를 만들어 제사에 사용할 가축들을 내보내셨습니다. 돈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말씀하십니다. 네, 흔히 영화에서 보는 노점상 철거 장면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예수님의 분노’를 걷어내고 본문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신 이유 속에는 분명 종교 권력자, 기득권들의 ‘종교적 타락, 부도덕’을 질타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진짜 목적은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심으로 더 이상 ‘종교 행위의 제사가 필요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정화’와 바로 연결되어 ‘친히 성전 되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기록자들(요한, 마가, 누가, 마태)을 통해 이 핵심을 부각시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4.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래도 ‘환호성을 지르는 인파 틈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 타심’에 집중해야 할까요? 이래도 ‘채찍을 들고 휘두르시며, 모든 것을 뒤엎으시는 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지고 나의 분노를 합리화하고, 내 자아의 의로움이 묻어난 날 선 비판을 정당화해야 합니까?

이 말씀 앞에 제 자신도 부끄럽습니다. 뭔가 여유가 있을 때, 종교적이어야만 할 때는 ‘겸손한 척’ 행하는 제 자신을 봅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고, 내 맘에 들지 않고, 내게 걸리는 무언가 있으면 ‘속에서 끓어오름’이 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상대방의 어떠함을 이용해 자신의 ‘화, 분노’를 정당화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상황에 대한 자신의 반응보다 상대방을 공격하기에 익숙한 제 자신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런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은혜의 십자가’ 앞으로 나갑니다. 십자가를 이용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긍휼을 덧입고, 함께 못 박히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내어놓을 때 ‘성령의 살리시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속에 가득한 ‘성령의 역사’가 넘쳐 흘러 우리 가정과 주변을 적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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