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가복음 10장 32~53절
1.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오해하고, 착각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가는 목적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 제자들은 차지할 한 자리를 위해 ‘종교 성전’을 향해 갑니다. 네, 같은 길 위에 있고, 같은 곳을 향하는 것 같지만, 마음 속은 완전히 다릅니다.
2. 이런 제자들을 향해 더 상세하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32~33절) 하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알아듣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35~45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2,000년 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는 ‘그 길’ 위의 제자들이었다고 해도 같은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더 한심한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기록이 있음에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분명한 이유를 그렇게 들었음에도 오늘 본문 속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3.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46절 이하에 기록된 ‘맹인 바디매오’ 때문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치유로 눈을 뜬 바디매오를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엔 ‘눈을 뜨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신의 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그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52절을 가만히 마음으로 그려봅니다. 눈을 뜨자 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창조주의 눈빛, 구원자의 눈빛, 생명과 사랑의 눈빛’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길”을 따라갑니다. 45절의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한 그 길, 예수의 길”을 따라갑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따라 갑니다.
4. 오늘날 참 많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겉으로는 같은 인쇄된 성경을 보고, 같은 조직 교회를 다니고, 같은 각 종 예배를 드립니다. 최종의 소망도 같은 천국입니다. 하지만, 속마음의 상태는 완전히 다릅니다. 각양각색입니다.
혹시 우리, 바디매오처럼 ‘예수의 길’ 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내가 아닌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심으로만 걸을 수 있는 ‘예수의 길’을 따라 가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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