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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9일 2021년 화요일 묵상

본문: 시편 59편 1~17절


1. ‘시편 59편’의 내용을 보면 사울에게 고통을 당한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표제에 기록된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의 역사적 배경은 사무엘상 19장11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사울이 단창을 들어 다윗을 죽이려 했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집으로 도망갑니다. 사울은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들(군사들)을 보내 지키다가 아침에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이 다윗을 도망 치게 합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후 사울은 계속 사람을 보내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녔습니다.


2. 사울에 대한 다윗의 악감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자신을 추격하는 사울과 그의 추종세력들을 ‘울부짖는 개(6절)’에 비유하거나, 자신을 쫓아다니는 그들의 악과 광기를 ‘입에 칼을 물고 다니는 것(7절)’으로 묘사한 것은 순화된 표현일 정도입니다.

게다가 10~15절에 사울로 대표되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보복)을 구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마음이 솔직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3. 언제나 그렇듯 이 시편의 최종 주제는 ‘악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보응, 심판, 갚아 주심’이 아닙니다. 선한 나에게, 선택 받은 나에게 해를 끼친 저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보복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시편의 핵심은 16절의 ‘주의 인자하심’과 17절의 ‘나를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물론, ‘악인에게는 심판을, 나에게는 긍휼 베풀어 주옵소서’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붙들게 하옵소서’입니다.

16, 17절에 ‘인자하심’과 ‘긍휼히 여기시는’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chesed)’입니다.

‘은혜, 긍휼, 자비, 인자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헤세드’는 구약성경, 아니 성경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어떠하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절대 절망과 죽움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에게 대속의 은혜를 통해 베푸시는 ‘헤세드’는 그 어떤 설명과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습니다.


4. 다윗은 누구보다 ‘헤세드’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사울을 향해 단순히 ‘보복성 시편’을 기록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4~17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먼저 16절의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이라는 표현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요한 새벽 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일까요? 그것도 맞습니다만, 이 표현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입니다. ‘가장 먼저’입니다. ‘항상’입니다.

내가 가장 먼저, 매일 매일, 그리고 항상(죽는 그날까지)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헤세드(인자, 긍휼)’을 구하겠다는 말입니다.


5. 이 마음으로 14~15절을 보면 악인들에 대한 다윗의 안타까움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에 대한 다윗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굶주린 개처럼 울부짖으며 나를 괴롭히고, 쫓아 다니는 이유는 ‘여호와의 헤세드’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사울이여, 난 지금 당신의 핍박에도 매일 매순간 ‘여호와의 헤세드’를 구합니다. 나의 힘이시며, 요새이신 여호와께 피합니다. 제발, 지난 날 ‘여호와의 헤세드’를 구하던 순수했던 사울의 모습으로 돌아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사울은 죽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헤세드를 놓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자신도 사울도 ‘여호와의 헤세드’를 놓치면 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헤세드’를 다시 붙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6. 어떤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복수의 칼을 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길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기도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하신 십자가의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는 사람’이라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일, 매순간 붙든 ‘십자가의 헤세드’가 우리 삶의 주변에 흘러 들기를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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