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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5일 2021년 금요일 묵상

본문: 시편 55편 1~23절


1. 오늘 본문인 ‘시편 55편’은 ‘시편 54편’과 같은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13~14절, 20~21절을 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배신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피해자, 그는 가해자’ 혹은 ‘나는 의인, 너는 악인’이라는 단순한 관계의 등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시편 전체 아니, 성경 전체에서 ‘의인(義人)’은 사람에게 비난받지 않는 ‘종교적, 도덕적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가장 먼저 넘어질 자가 제 자신입니다.”라는 겸손한 자기 고백과 그에 맞는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을 고백한 다윗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 의로움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서 ‘선택된 자의 영적 자부심(?), 의로움’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다윗의 모든 고백(시편)은 ‘시편 51편’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고백이 그의 시편 속에 담겨있습니다. 이런 나에게도 ‘신실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로 다가오시는 그 분을 향한 갈망입니다.

2. 우리는 이런 다윗의 영적태도를 기억하면서 그가 기록한 시편을 봐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말씀드립니다만 ‘대속의 은혜’에 대한 겸손하고 낮은 영적 태도가 우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 만들어 갑니다.

왕의 자리에 있었던 다윗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엎드린 다윗의 모습을 기억하며 오늘 본문(시편 55편)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내용이 없습니다.)

저는 가장 먼저 2절의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엎드린 다윗’을 일으키시기 위해 ‘굽히시는 하나님’이 그렸습니다.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 허리를 굽혀 그의 읊조리는 고백에 귀를 기울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기도의 태도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당한 일, 내가 처한 일에 대한 억울함과 울분으로 가득 찬 소리지름이 아니라, 엎드려 위로부터 임하는 긍휼과 위로, 치유를 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 지어, 나의 괴로움과 고통만을 호소하는 것은 좋은 기도의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3절 이하에 이어지는 표현들은 다윗의 아프고, 억울한 심정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9절), 심지어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해달라(23절)’는 등의 과격한(?)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소위 ‘말씀 붙들고 기도하라’는 권면을 오해해서 이런 표현들을 기도에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의 구원을 믿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주술사들이 주문을 외우듯 이런 말씀을 자신의 복수(?)를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3. 다윗이 당한 배신과 모함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처럼 아픈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나를 모함하기 위해 뱉아 내는 말(21절)를 생각하면 역겨움의 소름이 돋아날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여기저기 사람을 먼저 만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앞으로 향했습니다. “짐(22절)”이라고 표현된 ‘모든 아픔과 억울함’을 여호와께 맡겼습니다. 그 분께 고합니다. 그렇게 여호와께 붙들림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다윗이 이 고백까지 오는 데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방향이 자신을 향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며 이 일과 상황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자기 내면의 상태와 씨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배신한 사람, 공격한 사람의 배후에서 장난 치는 사탄 마귀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이용하여 공격하고, 그 공격을 빌미로 내 마음을 흔드는 사탄 마귀의 교묘한 술책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14절은 단순하게 “나를 책망하는 자가 차라리 내 원수면 내가 참았을 것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정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그를 피했을 것이다. 결국, 나를 배신한 것들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함께 신앙생활하고, 같이 놀았던 친구였다.”라는 표현을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용해서 나를 무너뜨리려는 교묘한 사탄 마귀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사탄아, 물러가라!”는 식의 주술적 ‘대적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과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모든 짐(감정, 생각, 판단 등)’을 여호와께 맡깁니다. 여호와의 신실한 언약에 붙들리는 것을 택합니다.

지금 당장의 상황, 공격, 형편보다 그것 때문에 흔들리는 내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런 내가 보이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십자가에 붙들림을 택합니다. 그일 너머에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인의 요동치 않음’인 줄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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