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54편 1~7절
1. 시편은 말 그대로 ‘시’입니다. 함축성이 뛰어납니다. 축약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편적 이해와 자기 중심적 이해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시편 54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무엘상 23장과 26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표제’에 기록된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대한 배경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도망자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척박한 지역인 ‘유다 광야’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 시간을 지낼 때 정말 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억울하고, 속상한 사건이 ‘십’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일어난 배신이었습니다. ‘십 사람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에게 쫓기며 같은 지파 사람이었던 ‘십 사람들의 배신’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한번도 아닌, 두번의 배신이었습니다. 그것도 ‘십 사람들’이 제 발로 사울을 찾아가 밀고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런 아픔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울의 옷깃만 베었습니다.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옵니다.
결국, 다윗이 승리자입니다. ‘십 사람의 밀고’에 대해 배신감과 분노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의 어떠함으로 사울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판단하여 사울의 왕 자격을 운운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사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믿음으로 그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2. 그렇습니다. ‘십 사람들의 배신’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태도와 반응’이었습니다. 자기가 의지하려던 것이 해악이 되어 돌아올지 언정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울(이미 세워진 왕)에 대한 태도를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십 사람들의 배신’은 이런 다윗의 믿음과 삶의 태도를 증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속칭, 뒷통수 맞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의 태도’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 정말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영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3절의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를 보면서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극악무도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사람입니다.’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태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내 앞에 두지 않으면,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 그 분의 십자가 앞에 단독자로 서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사울과 십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해 너무 자연스럽게 내 본성과 판단대로 반응하게 됩니다. 내 경험대로 움직입니다. 내가 익숙한 대로 행동해버립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과 십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당연히 잘 알았습니다. 본인들도 ‘나는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23장을 보면 그 증거가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기회를 주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다윗)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삼상23:7)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고, 길 열어 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3. 진정으로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둔 사람들의 특징이 또 있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단순할 정도로 ‘하나님’, 그 분만을 사랑합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앞에서 4~7절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조건을 두고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지하면 이 상황에서 건짐 받겠지. 믿고 순종하면 이 억울함을 갚아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 이름의 선하심(6절)’에 빠져듭니다. ‘주의 이름의 선하심’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는 좋은 것을 주는 초월자’ 수준의 생각이 아닙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이사야 42:8)며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신 이름 ‘여호와’의 의미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호와’라 이름 안에 있는 ‘언약의 신실함, 선함’을 묵상하게 됩니다. 대속의 은혜를 붙들고 돌이키는 자에게 베푸시는 풍성한 생명에 몰입하게 됩니다.
다윗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절박함을 만났습니다. 나를 죽이려는 자의 추격에 시달렸습니다. 의지하려던 모든 것이 끊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절박한 가운데 당한 배신의 아픔은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다른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무너지는 심정을 안고 언제나 내 앞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한대로 움직였습니다. 그의 기도를 내 수준에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옷자락만 베고, 창과 물병만 가져왔다는 것(삼상23, 26장)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5절의 참 뜻이 무엇일까요? 다윗의 이 마음, 이 믿음이 녹아 있습니다. “주께서는 원수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사울과 십 사람들에 대한 저의 판단을 내려놓습니다. 주님의 주권에 맡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주의 성실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멸하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이 다윗에게 없었다면,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 대신 목을 쳤을 것입니다.
내 앞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죄성과 본성의 익숙함에서 벗어나게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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