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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3일 2021년 수요일 묵상

본문: 시편 53편 1~6절

1. ‘시편 53편’은 ‘어리석은 무신론자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라는 주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설교할 때, 무신론자들에게 대항(?)할 때 이 시편을 자주 인용합니다.

본 시편은 같은 다윗의 시편인 ‘시편 14편’과 한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53편은 전능자를 의미하는 ‘하나님(Elohiym)’만을 사용했고, 14편에서는 언약의 이름인 ‘여호와(Jehovah)’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상상한 막연한 초월적 존재, 신적 존재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구체화시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언약을 기반으로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 안에 있는 ‘언약(십자가 언약)’을 붙든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찾는다는 뜻입니다.

시편 53편에서는 이 특징을 뚜렷이 구별하기 어렵지만,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 ‘시편 14편’에서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즉, 1절의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판단과 이성으로 ‘신적인 존재’가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입니다. 두번째는 신적인 존재를 인정하지만, 자기 필요에 따라 만든 신적 존재를 믿는 사람입니다. 네, ‘가짜 신, 내가 만든 신, Counterfeit gads’을 만들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2절은 ‘각자 자기 생각에 맞게 신을 판단하고 섬기는 모든 자들’을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여호와)의 마음’입니다. “나 여호와는 내가 베푼 언약을 붙들고 오직 나 만을 간절히 찾는 그 한사람을 찾고 있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대신 기록한 것입니다.


2. 이런 사람이 드뭅니다. 교회 안에도 진정으로 ‘십자가 언약’만을 붙든 사람이 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서두에서 말씀드린 ‘무신론자에 대한 책망’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는 쏙 빼놓고 이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2절에 “지각(知覺, understand)”으로 번역된 ‘sakal’은 ‘신중함, 현명함, 통찰력 등’의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에서 ‘찾는’으로 번역된 ‘darash’는 ‘매우 간절하게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함의 정도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정도입니다.

여기에 3절이 더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 혹은 율법을 어기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 받았다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 아래 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찾는 자도,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 하나도 없다!”라는 사도 바울의 피맺힌 고백, ‘로마서 3장 9~13절’과 직결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본문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그 십자가 안에 있는 언약을 정말 붙들었다면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으스대는 마음, 높아진 마음, 내 맘대로 살고 싶은 그 마음의 자세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내 안에 그런 마음을 발견할 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부여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3. 우리는 4절의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라는 다윗, 아니 하나님의 역설적 질문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정말 다양한 물음이 이 짧은 한마디에 들어 있습니다.

“너희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너희가 정말 나 여호와가 어떤 하나님인지 모르느냐? 너희가 믿는다는 ‘그 예수의 십자가’가 정말 성경을 통해 내가 말한 것이냐? 대체 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냐?”는 하나님의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대한 무지, 오해, 몰이해로 말미암는 기독교인의 삶의 결과는 4절 하반절 “그들이 떡(meal)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는 표현 속에는 ‘자기 맘대로 해석한 하나님을 믿고, 찾고, 부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참 두렵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비춰질까…?’ 무섭기까지 합니다. 특히, 목회자라는 저의 삶과 태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외면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뭐라 표현을 해야 할지…)

마태복음 18장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그렇게 행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 너희 자신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죽을 것처럼 붙들고, 허리가 굽어져 펴지지 않을지 언정 그 앞에 납작 엎드려 있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우리의 영적 간절함과 태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내 전인격을 포기하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하기 싫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이는 ‘시온에서 임하는 구원, 십자가를 통해 위로부터 임하는 기쁨(6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찾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십자가 언약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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