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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31일 2022년 목요일 묵상

본문: 레위기 17장 1~16절


1. 레위기의 중심에 흐르는 ‘대속의 은혜’, 범죄한 나 대신 드려지는 제물을 통해 용서함 받는 은혜는 ‘대속죄일(16장)’을 통해 정점을 이룹니다.

그렇게 레위기의 이야기는 17~26장에 기록된 성결법으로 이어집니다. 성결법은 ‘삶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사람, 깨끗해진 사람, 거룩하다 여김을 받는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법’입니다.

레위기 전반부의 ‘각 종 제사(죄 씻음과 용서를 위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과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삶’이 남아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 물론, ‘성화’는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삶이 아닙니다. ‘성화’는 ‘칭의’에 대한 결과입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로워진 것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내 자아의 모습이 지긋지긋해집니다. 이런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성화는 내가 거룩 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내(자아)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닮는 것이 아닙니다. 내 본성이 죽은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3. 레위기 17장 이후에 기록된 각종 성결의 삶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함,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삶을 그려봐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21세기의 시각’으로 레위기에 기록된 성결과 관련된 명령 등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지만, 그때 그들에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0절 이하에 ‘피를 먹지 말라’는 것도 위생의 문제, 도축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동물에 대한 검역 및 도축 체계가 없던 시대에 함부로 피를 먹는 것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4,500년 전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짐승을 잡아먹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피를 제거하고 먹으면 냄새도 덜 나고, 맛도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마구잡이로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법을 통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모두가 지켜야 합니다. (물론, 단순히 위생과 맛 때문에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4. 저는 레위기를 계속 묵상하면서 떠나지 않는 한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배려’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그냥 막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배려! 자기 좋은 것에 이끌려 그냥 그렇게 죽는 길로 가는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보였습니다.

3절 이하에 기록된 ‘모든 짐승을 잡을 때, 회막(성막)에 가져와서 화목제’로 드리라는 것이 ‘일단 나에게 먼저 갖다 받치고, 나머지 걸 먹어라’는 식의 종교 규례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자기 집에서 짐승을 도축하면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 급함 등’으로 마구 잡이로 잡아먹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허락된 귀한 고기, 풍성한 식탁이 될 수 있는 고기를 스스로 독으로 섭취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5. 저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화목제(7장)’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드시려고 화목제를 드리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입맛이 끌린다고 기름을 먹으면 안 된다. 기름은 죄를 상징한다. 그것은 나에게 가져와라. 나는 너희의 죄가 타는 그 냄새를 나는 기뻐한다. 그리고, 제일 좋은 부위는 너희가 먹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6절)

말씀 앞에 또 기도합니다. “내 판단, 내 본성대로 하기 위해 혼자(자기 내면의 어두운 곳, 자아의 집) 꾸미는 어떤 일이 없는가? 내 맘대로 도축하여 즐기기 위해 회막(성막, 십자가 앞)으로 가져 나오지 않은 가축들이 없는가?”라는 두려울 정도로 심각한 질문을 품고 기도합니다. 실컷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 진리를 전파하고, 저는 십자가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삶의 열매를 먹게 될까 두려워서 더 엎드립니다. (정말, ‘고린도전서 9장 27절’ 말씀이 무섭습니다. 사도 바울 조차 그런 고백을 했는데, 저는…)

그래서, 결론을 “없다. 그건 절대 아니야.”라고 내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건 스스로 속이기 위한 제 마음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로, 그 거다.”라는 음성을 붙듭니다. 그 음성을 기뻐하게 해달라고 더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늘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은 성화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 속에 여전히 남은 본성, 찌꺼기 기름 같은 남은 내 자아를 예수님 앞에 내놓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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