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Hyung Yun

3월 30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레위기 16장 23~34절


1. 레위기 16장은 대속죄일과 관련된 규례입니다. 대속죄일에 대한 준비, 실행, 마무리 단계로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무리 단계 및 정결 의식의 후속 절차를 소개합니다.

이 절차는 대제사장 아론(23~25절), 광야에 놓아준 아세살 염소를 데리고 나갔던 사람(26절), 속죄제물의 고기를 처리한 사람(27~28절)이 제사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마치고 마무리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단락에서 매년 지켜야 할 대속죄일의 날짜와 지켜야 할 규례들이 공식적으로 확정됩니다(29~34절).

대속죄일은 레위기에 기록된 모든 제사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대속의 은혜가 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선포되고, 강조되고, 갱신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속죄일의 규례는 ‘레위기 23장, 민수기 29장’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대속죄일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26절의 ‘아사셀 염소(8~10, 20~21, 26절)’와 ‘세마포 속옷(4, 23절)’입니다. (어제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속죄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 마리의 염소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 마리는 제물로 드립니다. 한 마리는 안수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를 전가(transfer)시킨 뒤 먼 광야로 내보냅니다.

제물로 드려진(대신 죽임을 당한) 염소의 피는 속죄를 위해 제단에 바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염소(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보냅니다.

왜 이렇게 했을까요? 성경에는 정확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아사셀 염소’를 모두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멀리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아사셀 염소’가 먼 광야로 떠나는 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아사셀(Azazel)’이는 이름에 관하여 학자들의 일치된 해석은 없지만, 대체로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히브리어에서 ‘떠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azal’과 ‘염소’라는 뜻의 ‘ez’의 합성어라는 견해입니다.

둘째는 ‘아사셀’을 반역한 천사의 우두머리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에는 ‘아사셀’이 사탄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정경으로 인정하는 ‘에녹 1서(개신교는 위경, 로마카톨릭은 외경으로 여김)’에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의 유래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광야로 떠나는 염소가 자신들의 죄를 지고 멀리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 염소는 광야 어딘가에서 짐승에 찢기거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그 염소를 직접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크게 세가지 마음이 겹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인생은 방황과 죽음이구나’라는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번째는 ‘그러나,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나의 죄가 멀리 떠나갔구나. 이제 하나님은 나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구나’라는 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입니다.

세번째는 ‘죄를 대신 짊어진 존재’에 대한 감사입니다. 아니, 감사라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안되는 감사입니다.

4. 정상적인(하나님이 베푸신 진정한 속죄의 의미를 잊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화려한 대제사장의 의복(에봇, ephod)을 벗고, 세마포 속옷을 입고 모든 대속죄일의 규례를 행하는 아론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쓰고 있는 모든 껍데기’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은 세마포 옷, 그 손에 ‘가리기 위한 향연(13절)’을 들고, 제단에 피를 바르는 모습을 보면서 “‘대신 죽은 존재의 피’가 아니면, 이런 나를 가려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라는 영적 진리를 영혼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고, 가리움 받은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진짜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분명해졌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옮기시고(시103:12), 우리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기 위해(히8:12; 10:17)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29, 31절의 “스스로 괴롭게”라는 것은 ‘고행’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anah’의 뜻은 ‘장악되다. 굴복 되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은혜와 사랑에 죄악된 나의 전 존재가 녹아 내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장악 당하고, 굴복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합니다. “이런 나를 십자가에 쳐 복종시키는 것이 기쁘지 않은데, 과연 나는 그리스도인인가?”라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27절을 꼭 묵상해보십시오.)

너무 많이 듣고, 아는 것 때문에 진리가 저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또 십자가 앞에 엎드립니다. 나를 쳐 굴복시키시는 은혜를 두렵지만 기쁨으로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조회수 20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