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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2022년 수요일 묵상

본문: 레위기 2장 1~16절

1. 레위기 1장에 기록된 ‘번제’의 예물(제물)은 ‘동물’이었습니다. 2장에서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素祭, Grain offering)’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소제’는 단순하게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 방법이 아닙니다. ‘소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minchah’는 ‘드려진 것’, ‘선물’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소제’와 관련된 내용을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곡식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방법(1~3절)입니다. 둘째, 고운 가루를 익혀서 드리는 것(4~10절)입니다. 마지막으로 첫 이삭을 드리는 방법(14~16절)입니다.


2. ‘소제’를 드리는 방법 외에 우리가 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소제’를 드리는 것과 관련해서 “네가 또는 너는(4~8, 11~15절)”이라며 ‘2인칭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사들은 “그는 또는 그가”라는 ‘3인칭 주어’로 표현된 것과 사뭇 다릅니다.

다른 제사와 관련된 것은 마치 ‘모세’ 또는 ‘제사장들’을 거쳐서 말씀하시고,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소제’만큼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주체(죄를 고백하며 엎드린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물론,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작은 것에도 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때문입니다. 친밀한 관계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까다로운(?) 제사의 규례를 주신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함, 진실함을 회복하시려는 것입니다. 친밀함, 진실함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 친밀함과 진실됨의 회복이 소제 속에 담겨 있음을 묵상하며 피식 웃음짓는 묵상이 있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는 음식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4~10절을 보면 정말 다양한 조리법(?)이 등장합니다. ‘화덕에 구운 것(4절)’, ‘철판에 부친 것(5~6절)’, ‘냄비로 만든 것(7절)’이라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미 머리 속에 이런저런 음식이 연상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 결국 민간에 흘러 들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음식들이 탄생했을 것입니다. 특히,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는 가장 일반적인 식재료였기에 다양한 조리법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이런 규례를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물론, 저는 그랬을 것이라 믿지만, 성경 기록이 없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소제’를 드리는 방법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싫어 버린 인간보다 그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 관계 회복을 통한 친밀함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비추셨습니다.


4. 무엇보다 ‘소제’는 제사 중에서 가장 접근의 문턱이 낮았습니다. 다른 제사들과 비교했을 때, 신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누구나 드릴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소제’는 대부분 단독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번제(레9:17)’나 ‘화목제(레7:11~13)’와 함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속죄의 제사’에서는 ‘소제’만 단독으로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죄를 위하여 ‘산비둘기’조차 드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고운 가루 십 분의 일’을 기름과 유향 없이 속죄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값비싼 ‘기름과 유향’도 섞지 않아도 됩니다(레위기5장11절).

물론, 이럴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 십 분의 일도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습니다. ‘십 분의 일(1/10) 에바’라는 단위를 정확히 환산할 수 없지만, 대략 2리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한 가족이 하루 내지 이틀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제발, 양의 많고 적음에 시선이 가면 안 됩니다.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봐야 합니다. 애끊는 중심을 가지고 나오는 하나님의 자녀를 만나 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과 그런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최소한의 제물)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의 범죄한 실존 앞에 절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소한의 배려’이자, ‘최대한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 속에는 ‘범죄한 나에 대한 찢어지는 애통’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터질 듯한 소망’이 공존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최소한의 배려’이며, ‘최대한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붙드시길 축원합니다.


지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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