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52편 1~9절
1. 다윗의 시편 혹은 다윗과 관련된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해서 인간 다윗에 대한 신격화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 전반에 간섭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은 범죄한 인간, 치명적 약점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다윗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런 다윗의 인생을 통해 드러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핵심 가치입니다.
이렇게 설명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무조건 위대한 성경 인물 혹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신적 인물로 이해하고 ‘시편 52편’을 보면 오해하기 딱 좋기 때문입니다.
‘시편 52편의 표제’를 보시면 ‘도엑’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도엑’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너무 자연스럽게 ‘선악구도’를 만듭니다. ‘다윗=선 Vs도엑(사울)=악’이라는 이해 속에서 말씀을 바라보려 합니다.
‘도엑’과 관련된 사건은 ‘사무엘상 21~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돔’사람이었던 ‘도엑’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는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칠 때 먹을 것(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주면서 도움을 준 ‘놉(지명)의 제사장들’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사울의 다른 신하들은 두려워서 하지 못한 제사장을 죽이는 일을 그가 했습니다. 그것도 ‘팔십오 명’과 더불어 제사장의 성읍이었던 ‘놉’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학살하고, 가축까지 몰살시켜버립니다.
2. ‘도엑’과 그에게 학살을 명령한 ‘사울’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만 더 생각해봅시다. 과연, 다윗은 이런 ‘도엑’을 비방하기 위해, ‘사울’을 비롯한 자신에게 대적한 세력을 비난하기 위하여 이 시편을 기록한 것일까요? 단순한 선악구도에서 자신의 선함 혹은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이 시편을 기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의 악함을 알고 있습니다. 1~7절에 해당하는 사람은 ‘도엑, 사울’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악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본인도 포함됩니다. 다윗이 8~9절의 고백을 한 것은 ‘나는 선택 받았으니까. 나는 뭔가 다르니까. 나는 하나님을 잘 섬겼으니까.’라는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집에 심긴 푸른 감람나무가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붙들지 않았다면, 1~7절의 모습은 나 자신입니다.”라는 고백이 8절입니다.
9절을 읽을 때, 자기 본성을 직시하는 다윗의 마음으로 읽어보십시오. “8절 역시 내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된 것입니다. 감사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악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이끈 것입니다. 모두 앞에서 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합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3. 하나님 말씀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지식을 쌓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 신비한 종교적 삶을 살거나 신적 인도함(?)을 받기 위해 읽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자를 감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달되어 어두운 내 심령에 비추임을 받게 하기 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해 내가 보여야 합니다. ‘도엑의 포악과 악한 계획(1절), 도엑의 간사한 마음과 혀(2, 4절)’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시편 51편’과 ‘시편 52편’을 연결하여 읽으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다윗은 ‘도엑=나(다윗)’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밧세바 사건’을 읽어보십시오. ‘밧세바를 유혹하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을 죽일 때 ‘다윗의 혀, 악한 계획, 포악함’이 어떠했는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다윗의 위대함이 ‘왕’이 된 것, 하나님께 ‘쓰임 받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의 솔직함(시편 51, 52편, 사무엘하 22장)이 다윗의 위대함(?)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의 성품혹은 성격으로 솔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경외감과 이런 죄인을 용서하시는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에 솔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 정직하고 솔직할 수 없는 간사한 죄인이 여호와의 긍휼하신 은혜, 구원의 은총을 정말 체험하면 솔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숨길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리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롭습니다. 썩어가는 내 영혼의 어두움을 숨기는 것이 더 힘듭니다. (생명이 있다면 곪은 자리에서 발생하는 통증과 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아픔, 부끄러움과 수치를 견디고, 십자가로 비추임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성령과 말씀의 검으로 수술 당하는 것이 회복과 구원의 유일한 방법임을 믿고 나아갑니다.
우리 ‘하나님의 집’은 병든 인간 영혼을 치유하는 유일한 ‘영혼의 수술실이자, 회복실’인 줄 믿습니다.
거기에 누워 사모하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나를 살리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궁극의 소망이 되길 축원합니다. 그 예수님만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지민철 목사
Comments